2005.9
알프스 산행 마지막 날, 잠결에 들으니 밤새 비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태풍이 그 위세를 본격적으로 떨치는 듯 하여 마음이 불안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 위세는 여전하여 하산길이 걱정된다.
오늘은 호다카다케(穗高岳) 산장을 출발하여 북알프스 최고봉 오꾸호다까다께(墺穗高岳/3,190m)를 올랐다가 마에호다까다께(前穗高岳/3,090m)를 경유, 다께사와(岳澤)휴테를 지나 가미고지(上高池)로 내려가는 총 12km, 산행시간 7시간의 코스다. 그런데 정상까지의 암벽 길은 1km밖에 안되지만 그다음 마에호다까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위험하다.
어제 올라올 때의 상황을 보아서는 예정된 코스로 내려가기에는 무리가 따른 다는 판단아래 하산코스를 우리가 올라온 길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하산 길은 약 12km로 전체 거리는 다께사와로 내려가는 것 보다 길기는 하지만 어제 올라왔던 길이고 험로가 별로 없기 때문에 비가와도 큰 문제는 없다.
빗속에 산장을 나서는 얼굴들은 상당히 긴장된 모습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세퍼레이트 형이 아닌 판초우의는 바람에 날려 애를 먹는다.
예상대로 호다카다케 산장에서 가라사와(涸澤)까지의 암석지대를 내려갈 때는 조금 애를 먹었는데 특히 여자회원들은 상당히 힘들어 한다. 그리고 그중 한사람은 어젯밤에 고소증세로 잠을 잘못 자 고생을 한 탓에 더욱 발걸음이 느려지고 위험지대에서 겁을 낸다.
그러나 1시간여 만에 위험지역을 무사히 벗어나 어제 들렸던 가라사와 산장 우측 아래쪽에 있는 가라사와 휴테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하산을 하였다.
옛날 몇 번 왔을 때는 이 가라사와 휴테에서 계속 묵었었는데 오래간만에 와보니 그사이 확장을 하고 시설도 좋아졌다.


비도 피할 겸, 잠시 들려 휴식을 취하면서 너무 젖은 옷은 갈아 입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손님은 없고 조용한데 우리가 들어가니 여주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가라사와 휴테부터의 하산 길은 고산을 오르면서 이겨내야 하는 고소 극복의 어려움도 없고 길도 편안한데 단지 내리는 비가 발걸음을 느리게 할 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비가 많이 내려 사진기를 꺼낼 수 없다는 점인데 비가 많이 올 때는 방수 케이스의 지참이 필요할 듯하다.
요꼬계곡이 가까워지면서 숲이 시작되고 오른쪽 병풍암의 시커먼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마침내
혼다니바시(本谷橋)의 모습이 보인다. 다리에서 뒤에 오는 팀을 기다리며 쉬는 시간에 우리가 내려온 곳을 되돌아보니 시커먼 구름에 가려 위는 구름속 세상이다.
그래도 출발할 때보다는 빗줄기가 많이 약해진 듯하다. 오후에는 태풍이 빠져나간다고 했으니 이제 날씨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요꼬산장을 향하여 가는 길에 우리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병풍암 높은 벼랑위에는 비가 오는 바람에, 없던 폭포가 생겼는데 제법 수량이 많은 물줄기가 밑으로 떨어지다가 바람에 날려 공중에서 흩어져 버린다. 한참을 구경했는데도 물줄기는 땅으로 떨어지지를 못하고 바람에 날려 공중분해가 되고 있다.
요꼬산장에 도착을 하니 12시가 채 안되었다. 비도 오고하니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산장에서 라면을 사서 같이 먹기로 했다.
일본 라면은 아무래도 우리나라 라면 맛은 안 난다. 옆에서 가지고 온 우리나라 컵라면을 뜨거운 물을 부어서 먹는데 그 냄새가 기가 막히다.
요꼬(橫尾)산장에서 가미고지(上高池)까지는 11km의 거리, 아직도 세 시간은 걸어야 하는데 출발하는 발걸음이 너무나 빠르다.
빨리 산장에 가서 옷 갈아입고 더운물에 목욕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연히 마음이 급해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끝까지 산행의 리듬을 지키는 것이 좋다.




아니나 다를까 한시간정도 가더니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일부 회원들은 빠른 속도를 원망하기 까지 하는데 나중에는 지쳐서 비가 오는 길가에 앉아서 쉬기도 한다. 이곳에서 부터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으니 알아서 가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급한 성격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성격은 화끈한 면도 있지만 너무 경솔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일본 사람들의 집을 가보거나 아니면 이번 산행중 여러 산장이나 여관에서도 보았지만 일본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은 뒤에 나올 때 신기 편하게 가지런히 해서 되돌려 놓는다.
한국 사람의 경우 집에 들어가서 신발을 벗은 뒤 되돌려 놓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으리라. 신발을 되돌려 나란히 놓기는커녕, 휙 벗어 던지고 들어가는 바람에 식구가 많은 집은 신발의 짝을 맞추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지진의 피해가 많은 일본은 급할 때 신발을 빨리 신고 나갈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데 이제는 완전히 하나의 생활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민족 특유의 습관이 생활속에 정착되기 까지는 백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데, 여기에 일본사람들의 무서운 면을 볼 수가 있다.

가미고지(上高池)에 도착을 한 시간은 오후 3시 반, 어제 산행을 안 하고 먼저 내려온 두 사람과 반갑게 만났다. 이제 걱정했던 태풍속의 산행은 모두 무사히 끝났다.

방을 배정 받고 짐을 갖다 놓은 뒤 산장내의 온천장에 들어가 더운 물에 몸을 담그니 만사가 다 내 것 같다.
온천탕에는 산 방향으로 유리창이 크게 나 있어 탕 속에 앉아서 구름이 걷힌 산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유리창 위 벽에는 산 연봉의 모습과 봉우리 이름을 적어 놓은 사진이 있어 산을 보면서 이름을 알기 쉽도록 해 놓았다. 일본사람 특유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저녁식사는 6시부터라고 한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 별로 없어 배가 고픈데 우리 팀들은 맥주로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더니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달리는 것 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4시 반부터 시작한 술은 저녁을 먹은 뒤에도 계속되어 밤 10시까지 이어진다.

나는 일지감치 2층 침대칸에 올라가 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다.
마침내 自中之亂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야! 이제 그만 먹고 자자, 남들 다 자잖아”
“아니야, 이거 남은 거는 다 먹어야 돼”
“야, 인마 다른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우리가 얼마나 먹었냐? 이제 그만 자자”
“이 술은 어떻게 하고?”
“너 정말 이럴 거야?”
마침내 한사람이 일어나더니 남은 술을 창을 열고 밖으로 휙 던진다.
“어! 너 술 던졌어, 나가서 빨리 술 주워 와”
“미쳤냐? 내가 술 주우러 가게?”
금방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지만 한사람이 세게 나가면 한사람이 푹 죽는다.
이 술꾼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이다. 이제는 대기업의 사장과 임원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바쁘던 시절 서로 얼굴도 못보고 지내다가 이제는 주말마다 모여 산을 다니고 있다.
말끝마다 이 자식 저 자식 하면서도 미운정이 그리워 하루만 전화를 안 해도 궁금해서 안달들이다.
밖에 버린 술병은 찾으러 갈 생각도 않고 조용해지더니 조금 있다가는 코고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린다.
그렇게 하여 일본 여행 가미고지(上高池)의 마지막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