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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서의 봉사활동

라오스 한인쉼터의 애환

by 남상태 2023. 5. 26.
라오스 한인쉼터에서의 봉사활동 세 달, 그동안 나는 70 중반이 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봉사라는 단어에 그리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주위에서 어디 봉사를 하러 간다고 하면 그 내용을 알아보기도 전에 봉사 활동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면이 있지 않는가 라는 느낌이 들어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연말연시 독거노인들에게 연탄을 날라주거나 도시락 배달  해주면서 신문이나 TV에 얼굴을 비추는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의 모습은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와서 보면 나는 손하나 까딱 안 하면서도 그나마 하는 봉사를 하는사람들을  오히려 비난이나 하고 있었으니 나도 참 할 말이 없다.

 

봉사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봉사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영어로는 service라고 표현한다.

남을 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심이 되었든 가식이 되었든 쉬운 일은 아니다. 봉사는 한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적이어야 한다.

 

나는 2017년 3월에 라오스 비엔티안의 한인쉼터에 여행 와서 며칠 있는동안 한인쉼터의 하는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인쉼터의 백사장이라는 분은 50대 중반의 경상도 사나이로 해병대를 제대한 글자 그대로 돌격 앞으로 행동하는 중년의 사나이다. “옳은 일이나, 내가 할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본인이 손해가 나더라도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 3년간 한인쉼터를 운영하면서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영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남들은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우성인데 공짜로 쉼터를 마련을 해주고 여러 가지 편의 제공을 해주니  같은 업종 사람들이 좋게 생각 할리 만무다.

 

한인쉼터를 찾는 젊은이들은 늦은시간에 도착하는 이유도 있지만  조금 불편해도 싸고 편리하기 때문에 1불 게스트 하우스를 찾는다. 처음 한인쉼터를 열었을 때는 게스트 하우스나 미니 마트 등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먹고, 자고, 환전하고, 선물구입 하는 것들이 너무 불편해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인쉼터를 꾸미고 여행온 한국 젊은이들에게 실비로  편의 시설을 이용하도록 했다. 

 

이곳 한인쉼터는 1층 휴게실 내에서는 커피나, 와이파이 사용, 핸드폰 충전, 샤워, 휴식등은 전부 무료 제공이고, 기타 여러가지 여행중에 일어나는 돌발 상황들에 대하여 119역활 까지 해주고 있다.  그리고 한인쉼터에서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하는 봉사 이외에도 이곳 라오스 학교나, 체육분야 등에 정기적인 지원등을 해주고 있으며 이런 봉사 활동이 원만하게 진행 될수 있도록  한인쉼터 후원회를 구성한 뒤 본격적인 활동을 모색중이다.

 

우리가 외국 가서 여행을 하면서 숙소 선정에서부터 교통편, 쇼핑 등 여러 가지 닥치는 일 들을  한 번도 고생을 안하고 무난하게  끝냈다면 그거야 말로 대단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인쉼터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하면서 닥치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사전에 알려주고 인도하는 역할을 사비를 들여가며 3년여를 끌고 왔으니 이런 일이야 말로 진정한 봉사 정신이 아니겠는가?

 

아침 9시엔 백사장이 직접 여행에 필요한 여러정보를 들려준다

 

 

이런 내용들을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그동안 봉사라고는 해본 일도 없고 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조금은 부끄러운데 우리가 한평생을 살면서 과연 우리는 남의 도움을 절대 받지 않고 살 수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부모님들의 무조건 적인 희생과 봉사는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고 또 우리도 자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봉사를 한다.  우리는 살면서 문밖을 나서면서 시작되는 모든 일들은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자동차, 기차, 전철 그리고 잘 닦여진 도로, 철로, 모든 것들은 다 남의 도움으로 이루어 진 것들이다. 나는 문득 내가 우리나라에서 지금 내가 있는 라오스 까지 다른 사람들의 고생과 노력과 희생이 없었으면 무슨 방법으로 왔을 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한인 숙소에 묵으면서 자연스럽게 청소부터 시작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 한인 숙소의 손님들은 대부분 야간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또 도착을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손님을 전부 안내하고 나면 새벽 3시가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아침 업무 준비가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라오스 여행 코스는 비안티엔 도착부터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 날 루앙프라방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새벽 5시 넘어 도착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새벽에  갈 곳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굳게 닫힌 한인쉼터 문 앞에 짐을 놓고 문 열릴 때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직원들은  새벽 3시에 일을 마무리하고 쉬러 들어간다. 그리고 새벽에 도착하는 손님들이 매일 있는 것이 아니니 문을 열어 놓을 수도 없다. 한번은 대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놓았다가 도둑이 들어와 주차해 놓은 차를 가지고 간 적도 있다고 하니 생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한인쉼터 2층 숙소에서 묵는데 하루는 새벽 5시 조금 넘어 일어나서 밖을 나가보니 젊은 친구 서너 명이 잠겨진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타향 땅 객지에서 얼마나 처량한 모습인가? 얼른 내려가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뒤부터 문은 내가 일찍 열기 시작 했다.

그리고 간단한 청소부터 시작을 하였다. 백사장은 나보고 청소를 직접 하지 말고 라오스 직원들이 나오면 시키라고 한다. 그런데 어지럽혀 있는 쉼터를 보고서 손 놓고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서 시작된 한인 쉼터의 봉사 활동은 어느새 세 달이 지났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한국에 있으면 과연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나이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이에 특별한 기능이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노인정에 가서 시간을 보내거나 빈둥빈둥 집에서 삼식이 노릇하면서 마누라 눈치 보는 일 밖에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외국에서 이름도 거창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남이 보기에도 훨씬 폼 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과 매일 얼굴을 대하니 정신 건강에도 상당히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은 유수와 같고 시위 떠난 화살과 같다고 했다. 70대의 세월의 속도는 나이대로 간다는데  70km로 달리고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라 금년도 어느새 반이 지났다.  점점 빨라질 세월의 속도에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뜸 드릴 시간이 있다는 얘기인가?

인생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내 인생의 마무리는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마지막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비엔티안에서 생활을 하면서 백사장과 같이 여러 군데를 다녔다. 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곳이 이곳 학교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60년대의 모습? 6.25를 겪은 나의 기억으로는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1950년 6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8살의 나이였다. 전쟁난지 며칠 만에 짐 싸들고 떠난 피난길은 영등포 집에서 몇 발자국 안 되는 시흥 외가댁이 종착점이 되고 말았다. 9.28 서울 수복 후 학교에 복귀한 우리는 학교 교사에 미군 부대가 들어가 있는 바람에 풍찬노숙신세, 야외에서 책상 대신 널빤지를 끈에 매어 목에 걸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고 공부를 하였다.

 

지금 라오스의 변두리 학교가 그 모양이다. 책상,걸상도 형편없고 칠판은 벽인지 칠판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 교사 봉급은 한 달에 교사 200불, 교장 400불이라는데 학생들 1년 월사금은 우리나라 돈 1만 4천 원이다.  그것도 미납자가 많아  학교 운영에 애로가 많다. 학교를 방문한 영여행자들이 여행 경비 줄여 4, 5백 불 걷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들은 기부자 앞에서 고맙다고 춤추고 노래 불러 답례를 한다.

한국 봉사단이 와서 칠을 해주고 간 학교

 

내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미군부대 근처 철조망에 몰려가 막사에서 쉬고 있는 미군들에게 “헬로, 기브미 쪼코렛” 외치면 고향생각 하던 미군들은 애들이 귀여워 과자나 초콜릿을 던져 준다.

나는 지금도 생각이 난다.  친구들 뒤에서  친구들 처럼 초콜릿 달라는 소리를 못하고 뻘쭘이 서 있다가 초콜릿 받아서 맛있게 먹는 친구들을 부럽게 쳐다보던 어린 내 모습이…….

그런데 지금의 라오스가 나의 어린시절에 보았던  우리나라의 모습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