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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산

민둥산 억새밭

by 남상태 2023. 5. 19.

가을 산행은 단풍과 억새산행이 제격이다. 단풍이야 서울 근교 산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억새는 큰맘을 먹어야 볼 수가 있다. 민둥산은 사실 서울에서 당일로 가기에는 조금 먼 듯한 느낌이 든다. 버스를 타면 갈 때는 상관이 없지만 올 때 길이 막혀 애를 먹기 때문에 기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아침 8시,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을 떨다보니 청량리 역에 도착한 시간이 7시 40분, 그런데 벌써 두 사람이나 나와 있다. 일행 중 한사람은, 오래간만에 기차를 타고 여행갈 생각을 하니 잠이 잘 안 오더라고 소년 같은 감상을 피력한다.
집합시간 8시에 우리 일행 6명은 모두 늦지 않게 도착을 하여 표를 끊은 뒤 개찰구로 나갔다. 우리나라 기차중 제일 비싼 새마을 열차라 그런지 자리도 널찍하고 차내의 시설이 잘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다.
 
시간이 날 때면 같이 어울리는 우리 산 친구들은 장장 3시간 40분의 기차여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준비래야 별것인가? 마주볼 수 있게 의자를 돌려놓고 멀리 배정받은 좌석은 손님들에게 양해를 받아 한 곳으로 모이니 이제는 얼굴 마주보며 정담을 나눌 일만 남았다.
기차여행은 낭만이 있다.
버스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고 화장실도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하다 지치면 술과 간식도 먹을 수도 있고 그도 싫증나면 잠을 자도 되니 버스 여행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널찍한 차장 밖으로 전개되는 전원과 산야의 풍경은 우리를 상념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기 딱 좋은 분위기 이다.
 
오래간 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얘기는 끝도 없고 한도 없다.
60이 넘은 사람들이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떠드는 소리가 오히려 정겹게 들리는 것은 그만큼 친하다는 표시가 아닌가?
오래간 만의 기차 여행은 그래서 즐겁기만 하다.
 
12시 10분, 예정대로 증산 역에 내리니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조그만 시골 역은 어쩐지 우리에게 정다움을 느끼게 한다.
오래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증산 시내는 열여덟 어린 처녀가 이제 막 서투른 화장을 시작한 듯, 어쩐지 조금은 어색한 현대 도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역 앞의 사우나 모텔 간판은 주위의 풍경과 너무나 안 어울린다.
 
역 앞 작은 광장에 서니 증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민둥산 전경이 환하게 들어온다.
정상부근은 나무가 보이지 않아 훤한데 그 아래는 푸른 침엽수 숲 사이에 잎이 노란 낙엽송 숲과 잎이 떨어진 활엽수 지역이 섞여있어 마치 기계 충을 앓아 머리가 드문드문 빠진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를 보는 듯 하다.
 
높이는 1,119미터나 되지만 어쩐지 초라한 작은 동산 같은 느낌의 산 모습은 민둥산에 대한 큰 기대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산 밑에서 정상부근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등산로에는 줄을 지어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침엽수 숲 사이로 보이다 말다 하는데 관광버스로 우리보다 앞서 온 사람들인 듯 하다.
 
역에서 산행 들머리까지는 약 20분의 거리인데 등산로 입구에 가까워지니 아니나 다를까 관광버스들이 길옆 빈터에 빼곡히 서있다.
제천과 태백을 잇는 38번 지방도로에서 우측 철길 아래로 뚫린 421번 정선으로 가는 좁은 도로에 들어서니 증산초등학교가 보이고 그 앞에 등산안내도가 그려진 커다란 간판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조그만 개울을 건너 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입구의 작은 다리가 보이는데 이 곳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민둥산의 억새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아저씨, 아주머니, 아이들 할 것 없이 북새통을 이룬다.
 
걸음이 빠른 일행 몇 사람은 뒷 사람을 기다리지도 않고 부지런히 올라가 버려 사진 몇 장 찍고 우물쭈물 하다보니 혼자 뒤처지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될 상황이 되었다.
부지런히 뒤쫓아 가려니 약간 쌀쌀한 날씨를 대비해 잔뜩 끼어 입은 옷이 처음부터 시작되는 급경사로 인해 땀이 나기 시작한다.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올라간 사람들을 원망하며 옷도 못 벗고 힘들게 올라가다보니 밑에서 볼 때는 동산 같아서 우습게 보이던 산이 너무나 힘이들어 괴롭기 짝이 없다.
 
보는 산과 오르는 산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동네 뒷산 같다고 우습게 본 방정맞은 내 짧은 소견을 한탄하며 사람들 틈에 끼어 힘들게 올라가는데 바로 앞에 하이힐 신고 올라가는 아가씨가 보인다.
참으로 대단한 아가씨라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다행이도 바지를 입고가 뒤에 올라가는 사람의 민망함을 덜어준다.
 
숲 속 길이 계속되며 나무에 시야가 가려서 정상이 보이지 않는데 어느새 1시간 가까이 걸었다.
등산 들머리 초입의 시간이 12시 반이었는데 벌써 1시가 훨씬 넘은 것이다.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등 비교적 침엽수가 많은 숲은 민둥산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제법 나무가 울창하여 줄을 서서 올라가고 내려오는 인파를 넉넉히 포용하고 있다.
 
땀을 흘리며 올라가다 보니 머리 위에 평탄한 지역이 나타나고 벤치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 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우리 일행의 모습도 보인다.
아마도 등산로 중간에 널찍한 휴식 지역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짐작을 하고 마지막 숨을 고르며 올라서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어?” 라는 탄성이 나온다.
그곳은 휴식장소가 아니고 밑에서 우회하여 올라온 자동차 길이었던 것이다.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는 물론이고 길 양쪽에 빈틈없이 주차해 놓은 차들은 주차장을 연상케 하는데 포장마차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막걸리와 음식들을 사먹는 모습이 시장 터나 다름 없다.
 
선계에서 적응 과정 없이 갑자기 속세에 떨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땀 흘리며 올라온 내 자신이 허망하여 입맛이 씁쓸하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다시 30분 정도가 더 걸린다고 하는데 시간은 어느새 1시 반, 어차피 속세에 왔으니 빨리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편한 이치라 체념을 하고 우리도 길옆 바람이 불지 않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컵라면에 보온병의 물을 붓고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줌마가 한마디 한다.
"아이고! 그까짓 컵라면 먹고 요기가 되겠어요?"
다른 먹거리는 하나도 없이 오직 조그만 컵라면만 앞에 놓고 장정 여럿이 젓가락 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 어지간히 처량해 보였던 모양이다.
 
자동차 길에서 다시 시작되는 좁은 등산로는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정체현상을 일으킨다.
숲이 끝나고 앞부분이 훤해 지는것을 보니 정상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정상 부근은 기온이 낮은 듯 등산복 후드를 뒤집어쓰고 내려오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억새초원을 본 소감을 나름대로 피력하는데 모두들 가지각색이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흐뭇한 표정들만은 분명하다.
 
내려오던 어떤 아저씨가 한마디 하면서 지나간다.
"눈보다 희고, 이름보다 초라한 억새풀이어!............"
그 말을 들으며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한 충격이 나의 가슴을 때린다.
이 얼마나 억새풀에 대한 적절한 표현인가?
 
우리끼리 논쟁이 벌어졌다.
"저말은 자기가 직접 하는 얘기가 아닐 거야, 아마 정상에 써있는 안내판에 있는 글을 보고하는 말이겠지?"
"맞아 행색이 그게 아니지"
우리는 엉뚱한 사람을 공연히 매도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지었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시를 읊었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감정 표현을 적절하게 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 멋쟁이가 아닌가?
 
마침내 억새초원이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한다.
하얀 구름이 드문드문 떠있는 푸른 하늘과 장엄하게 펼쳐진 억새밭 초원은 스카이라인을 경계로 찬란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억새풀 위로 바람이 불면 자꾸만 흔들리는 얼굴 하나
억세게 붙들어도 붙들어 둘 수 없는 흔들림의 시작 "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은 어쩐지 우리를 슬프게 해준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조그만 저항도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억새풀 하나 하나는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20만평의 광활한 능선 위에 펼쳐진 억새풀의 흔들림은 너무나도 가슴 벅차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년 10월이면 여러곳에서 억새풀 축제가 열리는데 우리나라 5대 억새풀 군락지의 하나라는 이곳 민둥산 억새 초원은 높이가 천 미터가 넘으면서도 작은 동산처럼 보였던 것은 우리에게 이 억새풀 초원의 장관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다.
 
사진을 몇 장 찍다보니 걷는데 만 열중하는  우리 일행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족과 혹은 애인과 같이 온 사람들은 억새밭 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느라고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곳 저곳에서 웃음소리, 탄성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치는데 삶의 진정한 즐거움은 결국 우리의 평범한 생활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새밭 사이로 정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등산로에는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고 하늘과 맞닿은 민둥산 정상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외롭게 서있다.
 
정상 사진은 그 곳을 다녀온 증명사진이다.
사람 키보다 조금 작은 잘생긴 돌 앞면에 민둥산 1,119m 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써 있는데 모두들 그 돌을 얼싸 안고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하여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민둥산 정상은 동서남북 시야가 탁 터져서 전망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북쪽으로는 억새초원으로 이어진 지억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 두타산, 청옥산이 연결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치악산, 백덕산이 조망되며 동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의 함백산, 대덕산등의 장대한 능선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일망무제(一望無際), 망무제애(茫無際涯)”
눈이 모자라 보지 못할 뿐이지 시야는 끝이 없다.
 
하산 길은 올라온 곳과 반대편으로 내려가 계곡을 끼고 산을 한바퀴 돌아 발구덕을 지난뒤 다시 등산 기점인 증산초등학교로 내려가는 코스다.
숨이 턱에 닿아 올라오던 코스와는 달리 하산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사람도 별로 없어 마치 산보하는 기분이다.
 
하산 길에 뒤돌아본 정상부분은 시야가 달라지면서 또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준다.
역광으로 보이는 억새밭 능선의 스카이라인은 명암이 확연히 구분되며 능선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은 동적인 느낌과 정적인 느낌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람이 없는 하산 길은 참으로 낭만적이다.
 
조금 내려오니 이름도 희한한 발구덕 마을이 나타나는데 작명 이유는 발로 만든 광주리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의 지형은 광주리처럼 우묵한 곳이 많다.
다시 나타난 임도를 버리고 계곡 길로 들어서니 뜻밖에도 내려올수록 숲 속은 점점 깊어진다.
우리가 길을 잘 못들어 다른 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그도 잠시, 아까 우리가 올라갈 때 갈라진 등산로와 합쳐지고 이어서 증산 초등학교가 나타난다.
 
하산한 시간은 4시 30분, 총 산행시간은 안내표시대로 점심시간 합쳐서 4시간이 걸렸다.
증산 역에서 기차 출발시간이 6시 21분이니 앞으로 두 시간이나 남아있다.
산행후의 하산주 시간은 산행의 백미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술 한잔하기 딱 좋은 시간을 그냥 보낼 우리의 용사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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