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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산

아! 향로봉

by 남상태 2023. 5. 19.
강원도 고성군과 인제군에 걸쳐 있는 높이 1,293m의 향로봉은 6·25 당시 아군과 괴뢰군 사이에 벌어진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이다.
89회에 걸친 피아간의 공방전에 산화한 젊은 넋은 과연 얼마나 많은 숫자였을까?
 
향로봉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겨울철 간간히 최전방의 눈과 추위 소식을 전할 때 빠지지 않는 우리에게 익숙한 군사지역이다.
지리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은 북쪽을 향해 달려가다 진부령에서 그 발길을 멈추어야 하는데 진부령에서 이어진 마지막 봉우리인 향로봉(1,286m)은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많은 산악인들에게 항상 아쉬움을 주는 곳이다.
 
향로봉의 원래 이름은 마기라산(磨耆羅山)이라고 하는데 높고 험준한 산머리에 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구름이 걸쳐져 있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침 6시 반, 숙소인 알프스 리조트에서 식사를 마친 뒤 버스로 산행 깃점인 진부령을 향해 출발을 했다. 10분 만에 진부령(520m) 고개 군부대 앞에 도착을 한 뒤 간단한 입산절차를 마친 후 7시 20분 산행을 시작하였다.
행사 진행팀 몇 사람은 향로봉 정상에서의 3.1절 행사와 시산제 준비물을 가지고 군 트럭으로 올라갔고 도보팀 64명 역시 발걸음도 씩씩하게 출발을 했다.
 
일기예보에는 오늘은 바람이 불고 쌀쌀한 날씨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다행히 기온도 낮지 않고 바람도 없다. 더구나 진부령에서 향로봉 정상까지 자동차길로 이어진 비포장도로는 뜻밖에도 눈이 별로 없어 걷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진부령에서 향로봉까지는 군사지역이라 원래는 민간인들은 걸어서 갈수가 없는 곳이다. 군부대에서 차편을 제공하겠다는 것을 걸어서 가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여 걸어가게 되었는데 그 거리가 장장 12km, 왕복 24km나 되는데 우리나라 잇수로 산길 70리가 된다. 군인들이 보면 참으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어떻든 시작은 용감하였다. 선두의 발걸음이 엄청 빠르다. 선두가 반보로 가면 뒤에서는 한보요, 선두가 정상 걸음이면 뒤에서는 뛰다시피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선두는 항상 뒤에 오는 사람의 상황을 보면서 속도를 조절해 주어야 한다.
 
출발지인 진부령의 높이가 520m이고 정상인 향로봉이 1,293m인데 고도차 8백 미터를 4시간이나 올라가야 하는 장거리 코스이고 더구나 똑같은 코스를 되돌아 내려와야 하니 절대 서둘러 가야할 길이 아니다.
오늘 산행의 팀장인 나는 선두에서 달려가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오늘의 산행거리가 만만치 않으니 전체적인 체력 안배를 하며 천천히 가기를 주문하였지만 들은 척 만 척이다.
일반적으로 산행시에 보면 처음 시작할 때 빨리 올라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반부에 처지게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큰 나무들이 없어 시야가 탁 터진 능선 길은 薄霧(박무)현상으로 약간 흐리기는 하지만 맑은 날씨로 시야가 제법 멀리까지 간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어제 우리가 묵었던 진부령 리조트의 슬로프가 바로 눈 아래로 보이며, 남쪽으로 뻗어나간 백두대간의 산줄기인 마산봉, 신선봉, 상봉의 모습과 그 아래로 설악의 귓때기청봉, 대청봉의 모습이 확실히 조감된다.
오른쪽으로는 푸른 하늘과 맞닿은 동해바다의 해안선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고 북으로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금강산의 모습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여 남한 땅과 북한 땅이라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다.
 
간간히 나타나는 눈길은 걷기가 조심스러운데 간혹 올라가는 군 트럭은 전부 체인을 감아 험한 겨울산길에 익숙함이 보인다, 올해는 눈이 별로 오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지만 가는 길에 2미터 까지 눈금이 표시된 나무 기둥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면 이곳이 겨울에는 많은 눈이 오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옆에는 전신주가 우리를 계속 따라가는데 그 전신주에는 일련번호가 표시되어 있어 현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1번부터 시작된 전신주는 330번으로 끝이 난다.
 
1시간정도 약간 급한 경사길을 올라가니 칠절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이어지던 도로가 북쪽을 향하여 방향을 틀며 저 멀리 향로봉이 보이기 시작 한다. 직선거리로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굽이굽이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산길은 아직도 세 시간을 더 가야 한다.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산길은 여름철에는 온갖 보기드믄 야생화가 지천을 이루는 곳이라는데 눈조차 별로 없는 이른 봄 산록의 모습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지금 내가 한가롭게 걷고 있는 이 주위에서 6.25사변 전투 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겠는가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이 된다.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이 잘 닦여져 있지만 찻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급한 경사길에 아차하면 몇 십 미터씩 굴러 내려갈 정도의 험한 지형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무거운 총을 들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와, 여름에는 더위와 싸우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약 없는 하루하루 전투를 하였을 당시의 젊은 군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가곡 “비목”의 가사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아 아직도 어느 이름모를 계곡에 비목이 남아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게 된다.
 
칠절봉을 지나면서 높낮이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차도는 걷는 사람들을 서서히 지치게 만든다. 경사가 심하지 않으니 자주 쉬게 되지도 않고 변화가 없는 주위의 삭막한 경치는 심신을 피곤하게 한다.
군인 트럭이 오다가 뒤에 쳐진 사람들에게 타고가라고 권한다. 나 역시 타고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언제다시 이곳을 올수 있을 것인가? 유혹을 뿌리치고 상념에 젖으며 계속 걷기로 했다.
 
전신주의 번호는 어느새 200번이 넘어선다.
길에서 벗어나면 지뢰밭이니 절대로 길 밖으로 가지 말라는 군인들의 경고가 있었지만 평화로운 주위 분위기가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에 가던 한 친구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길가에 배낭을 벗어놓고 언덕위로 올라가서 볼일을 보고 있는
데 지나가던 트럭의 군인이 배낭을 보고는 질겁하고 소리치며 쫓아 올라간다. 그 친구가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곳에는 가지 말고 빨리 내려오라고 당부하고 내려온다.
 
길가의 전신주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현재의 위치 표시도 되지만 좁은 도로의 자동차 교행 지점도 알려주고 여러 가지 구호를 써 놓아 그것을 읽으면서 가노라면 지루함도 덜 수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고향의 부모형제 우릴 믿고 단잠을 이룬다”
“우리는 할 수 있다”
 
300개나 되는 전신주에 여러 가지 구호를 쓰려니 고생께나 했겠다.
 
전신주의 숫자가 300번에 가까워지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걷다보니 마지막 초소에 도착을 한다. 그런데 앞서간 일행들이 군인의 제지로 마지막 사람이 도착할 때가지 기다리고 있다.
인원파악을 해보니 48명, 도중에 16명이나 차를 타고 올라 간 모양이다. 다시 정상을 향해 지친 다리를 끌고 출발을 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아직 1시간을 더 가야 한다.
빤히 보이는 향로봉을 향해 한없이 걷는 다는 것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다. 인내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밑에서 올라오는 트럭에 염체불구하고 올라탄다.
끝까지 걸어서 올라간 사람은 결국 20여명으로 그 숫자가 줄었고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 예정시간보다 30분이나 늦었다.
 
향로봉 정상에는 백두대간 종주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기념비가 어지럽게 서있는데 나는 그런 비석들 보다는 바로 내려다보이는 북녘 땅에 더욱 관심이 간다.
향로봉 밑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굽이굽이 돌고 돌아 금강산으로 이어지는데 그리 멀리보이지 않는 금강산의 모습은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일반 산들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향로봉 정상에서 오늘이 마침 삼일절이라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며 삼일절 행사를 한 뒤 가지고온 돼지 머리와 제물로 제상을 차리고 산신제를 지냈다.
 
간단한 점심 식사 후 다시 출발, 멀고먼 하산 길을 시작했다.
올라올 때 고생한 사람들은 군인트럭을 타려고 이 눈치 저 눈치 본다. 아무리 자동차 길이라 하더라도 왕복 60리 길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자신 없는 사람들은 차라리 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배려라고 할 수있다.
 
하산 길은 거꾸로 전신주 숫자를 세면서 내려가야 한다. 330번부터 시작하여 250번 , 200번, 150등 50개의 숫자마다 쉬면서 내려가기로 했다. 후미를 봐야하는 나는 빨리 가고 싶어도 가지를 못한다.
뒤처진 사람들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걷고 있어 빨리 가자고 하기도 미안하다. 그래도 날씨가 많이 봐준 편이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고 춥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완주하기가 어려웠으리라.
 
100번 전신주가 보이니 거의 내려온 듯하다. 오후가 되니 기온이 내려가면서 녹던 빙판길이 다시 얼기 시작하는데 바로 앞에서 내려가던 일행 중 한사람이 벌렁 넘어지면서 뒷머리를 땅에 심하게 부딪친다.
모두들 놀래는 순간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머리를 싸안으며 주저앉은 그 사람에게 달려가 괜찮으냐고 물으니 머리만 아프다고 한다. 그 사람의 머리가 어지간한 석두가 아니었다면 여러 사람 고생할 뻔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1개 중대 정도의 군인들이 걸어서 올라온다. 늦은 시간에 언제 걸어서 올라갈지 걱정이 되는데 맨 뒤에는 이등병 계급의 졸병이 잘 걷지를 못하고 겨우 쫓아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인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니 체인을 감지 않은 트럭이 체인을 감느라고 지체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이 기다리는 시간에 걸어서 올라가는 모양이다.
 
시간은 어느새 4시가 넘었다. 하산 시간도 4시간이나 걸렸다. 점심시간 빼고 걷는 시간만 왕복 8시간. 오늘은 오래간만에 강행군을 한 셈이다.
 
뒤를 돌아보니 향로봉은 앞산에 가려 보이지 않고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의 스산한 기운만이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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