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수)
1986년의 새해 첫날은 밝았다. 지난밤 심하게 불던 바람은 아침이 되어도 그치질 않고 계속된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머리에 썼던 모자가 바람에 날려 계속 굴러 간다. 뒤쫓아 가다보니 모자는 한 참 굴러 언덕 아래 크레파스 속으로 사라진다. 내려가서 컴컴한 크레파스 밑을 보니 모자는커녕 나까지 내려오라는 듯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어 모자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새해 첫날 액땜을 했다고 애써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침에 C3로 짐 수송차 출발한 세 명의 셀파는 가다가 힘이 든다고 자기들 멋대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몰래 돌아온 이들이 아무소리도 안하고 슬그머니 자기들 텐트 안에 들어가 누워있어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소식이 없는 셀파들이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았는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다 보니 벌써 돌아와서 텐트 안에서 자고 있다는 소리다. 화가 나기 전에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등반이 오래 계속되다보니 셀파들도 지치고 힘이 드는가 보다.
베이스에서 짐 수송을 하러 올라온 6명의 셀파들은 짐을 놓자마자 도망치듯 서둘러 내려가 버린다.
점점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은 눈보라가 날려 10미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 우울한 마음뿐. 새해의 첫날은 역시 바람으로 시작해 바람으로 끝났다.
1월 2일 (목)
밤새도록 바람은 지치지도 않고 불어댄다. 식사 때면 10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식당텐트까지 가는 일도 큰일이다. 좁은 텐트 안에서 무거운 코브라 부츠를 신는 일도 어렵지만 모자에 장갑을 낀 뒤 텐트 자크를 열고 기어나가 다시 텐트를 닫고 나면 숨이 차서 식식거린다. 그러고 나서 지척의 식당텐트까지 가는 길은 10미터가 평지의 50M 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이제는 대원이고 셀파고 모두 피곤에 지친 표정이 역역하다.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아니 몇날 며칠을 텐트 안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노라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같이 텐트를 쓰고 있는 장경순 대원은 특히 참기가 어려운 듯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모른다.
“대장님 식도에서 큰 덩어리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울화가 치밀어 못 견디겠다는 표현이다. 하긴 너만 그러냐 나도 그렇다. 다만 내색만 못할 뿐이지.
모두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1월 3일 (금)
계속적인 악천후로 아무래도 쉽게 캠프 전진이 어려울 것 같아 장경순, 박성우 대원을 베이스로 하산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리를 해서라도 세 명의 셀파에게 C3까지 짐을 수송토록 했으나 내일 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날씨를 보니 더 고집부리기도 어려워 내가 양보를 했다.
저녁 무렵 저 아래 베이스 쪽 푸모리봉 머리위로 파란 하늘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 하더니 해가 지면서 또다시 강풍이 불기 시작한다.
베이스와의 교신에 메일런너가 편지를 가지고 올라왔다는 소식이다. 내일 도착한 편지와 야크 고기를 올려 보내겠다는 단장님의 말씀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1월 4일 (토)
잠시도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오늘 하려던 짐 수송은 엄두도 안 난다.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지나고 보면 잠간인 시간도 그 당시에는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 이렇게 무작정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가?
“철수”
이런 상황에 가장 매력적인 말일 수도 있다.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까지 하고도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이제는 대원들은 그만두고 셀파들 보기도 민망스럽다. 그러나 내 눈치만 슬슬 보는 그들에게 조그만 틈만 보이면 그들은 물론 나 역시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다.
박동석 대원의 말에 의하면 사다인 앙리타가 대장에게 잘 얘기해서 이제 그만 내려가는 것이 어떠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셀파의 책임자인 사다가 그 모양이니 다른 셀파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또 우리 대원 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인지?
나는 그 동안 가능하면 셀파들과 직접적인 접촉은 피했다. 지시할 일은 대원들을 통해서 하고 야단 칠 일도 대원들을 통해서 했다. 그러다 보니 셀파들은 나를 아주 어려워한다.
그렇게 한 것이 이만큼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장이란 사람이 대원들이나 셀파들 하고 희희낙락 웃고 떠들다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위계질서가 무너질 수가 있다.
하루 종일 텐트 안에서 몸은 꼼짝을 못하면서도 머리는 무척이나 복잡하다.
1월 5일 (일)
밤새 불어대던 바람이 아침에는 뜻밖에도 쾌청한 날씨로 변했다.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날씨가 변할 수 있을까 신기해 하면서도 절호의 기회를 놓칠 세라 각 캠프는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C2에서는 셀파 2명을 C3로 짐을 수송토록 출발을 시키고 김종호, 박동석 대원도 곧 뒤따라 C3로 올라갔다.
베이스에 있던 홍성암, 김영대 대원을 급히 C2로 올라오도록 하고 6명의 셀파도 같이 출발을 해서 짐을 수송토록 했다.
침체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런 날씨가 사흘만 계속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 드디어 기다린 보람이 있는가보다. 마음이 흥분되기 시작한다. 오늘은 정말 happy day이다.
1월 6일 (월)
아침에 텐트 밖을 보니 조용한 날씨에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 아니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있다. 까마귀들도 신나게 떼를 지어 먹이를 찾아서 텐트 주위를 날라 다닌다.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는지 꼼짝도 않더니 날씨가 좋아지자 재빨리 나타난다. 이런 추위와 바람에 죽지 않고 버티는 재주가 용하다. 맑은 날씨는 모두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 주었다.
아침에 C3를 출발하여 로체훼이스를 가로질러 싸우스콜로 향하는 김종호 부대장의 발걸음이 상당히 빨라 보인다. 망원경으로 계속 주시하며 이번만은 틀림없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다.
바람도 조용하고 날씨는 쾌청한데다가 공격조 몸놀림 또한 가벼우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게다가 싸우스콜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있고 8,500미터 지점에도 산소 2통과 휙스로프를 데포 시켜 놓았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밑에서는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2시 반 싸우스콜에 도착한 김종호 부대장으로부터 어이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C3에 남아있던 박동석 대원과 김종호 부대장의 무전 교신이 드문드문 잡혀서 대강의 상황이 정리된다.
“여기는 싸우스콜, C3 나와라”
“여기는 캠프 쓰리. 감 잡았습니다”
“지금 막 싸우스콜 캠프지에 도착했는데 이곳 상황이 아주 엉망이다. 먼저 놓고 간 텐트가 폭삭 주저앉아 사용이 전혀 불가능하다”
“그래요? 어떻게 사용할 수가 없겠습니까?”
“다시 한 번 살펴보겠지만 완전히 주저앉아서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바람이 굉장하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아무래도 하산해야 할 것 같다 “
베이스와 이곳 C2는 물론 C3도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한데 싸우스콜에서는 바람 때문에 버틸 수가 없다니 이 무슨 청천 날벼락인가?
제트 기류는 기류가 올라가고 내려감에 따라 그 영향권이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빤히 보이는 곳에서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리라고는 전혀 짐작을 못했다.
싸우스콜에는 지난번에 올라가 사용하다가 놓고 온 텐트가 있었는데 내려 올 때 바람을 염려하여 텐트 위를 휙스로프로 가로, 세로 튼튼하게 고정을 시켜 놓았다. 그런데 그동안의 엄청난 바람으로 인해 텐트가 요동을 치다가 팩은 빠져 버리고 폴은 부러진 채 강풍에 휘날리던 텐트는 가장 약한 부분인 바닥이 찢어지고 찢어진 바닥으로 슬리핑백과 기타 장비들이 빨려나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아무리 튼튼한 텐트라도 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C2에서 아침에 C4를 향해 떠났던 사다와 니마옹추도 중간 지점에다 지고 가던 짐을 데포시켜 놓고 C2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다음 단계에 대한 대비책이다. 싸우스콜에 서 사용할 새 텐트를 위해 C2의 텐트 한 동을 묶어 놓고 위로 올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제 부터의 고민은 텐트 운반이 문제가 아니다. 밑에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싸우스콜은 행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바람이 분다고 하니 올라가봐야 결국 헛수고가 될 것이 아닌가?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보름을 기다려 겨우 좋은 날씨가 왔다고 좋아 했는데 그것이 결국 허사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 끝에 결국 내일 김영대 대원을 C3로 올라가도록 준비를 시켰다.
1월 7일 (화)
아침에 김영대 대원은 C2를 출발하여 C3까지 가서 대기하고 2명의 셀파는 C4에 설치할 텐트와 기타 장비 등을 가지고 같이 출발하여 C3에서 박동석 대원과 합류한 뒤 다시 C4까지 가서 모래 김영대 대원이 정상 공격을 위해 야영을 할 텐트를 설치 한 뒤 C3로 내려오도록 하였다.
어떻든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오늘도 C2와 C3의 날씨는 얄미울 정도로 조용하다. C3에서 셀파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싸우스콜까지 올라간 박동석 대원으로부터 뒤 늦게 연락이 왔다. 그쪽 상황은 역시 절망적이라는 소식이다.
박동석 대원이 싸우스콜로 올라 간 뒤에 심한 추위와 바람으로 무전기 배터리가 얼어버려 통신이 두절되었다. C3에 올라가 무전교신 중계를 하던 김영대 대원은 박동석 대원이 사고가 난줄 알고 악을 쓰며 C4를 불러대는 바람에 각 텐트는 덩달아 비상에 들어갔다.
간신히 통화가 되어 텐트의 설치는 포기하고 가지고 간 장비와 식량 등을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잘 묶어놓고 내려오도록 했다.
3시 30분, C3로 내려온 박동석 대원은 엄청난 추위와 바람 때문에 코와 귀가 얼어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는 무전 연락이 왔다. 완전히 상처뿐인 영광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C2와 C3는 얄미울 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이제는 더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런 날씨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계절적인 영향이기 때문에 계절이 바뀌어 제트기류가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혼자 고민을 하다가 일단 전부 베이스로 철수하도록 했다. 철수 명령은 내려지고 하산 준비를 서둘렀다. 텐트 문을 열면 눈앞에 보이던 로체훼이스와 싸우스콜 그리고 왼쪽에 우뚝 서있는 에베레스트 남서벽등을 다시금 돌아보며 이제 내려가면 내 평생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된다.
아! 결국 이렇게 내려가고 마는가?
하늘은 여전히 우리를 조롱하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다.
1월 8일 (금)
C2를 철수하는 날. 날씨는 이상할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너무 화창하여 마치 봄날 같은 기분이 든다. 다만 정상 쪽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만이 우리의 하산을 비웃는 듯 계곡의 물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려올 뿐이다.
C3와 C2의 텐트와 식량 등은 잘 포장을 하여 정리해 놓아 다시 올라왔을 때 사용하기 쉽도록 해 놓은뒤 대원들의 하산은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 후 셀파 한명과 내가 먼저 출발을 하였다. 베이스캠프를 12월 8일 떠났으니 꼭 한 달만의 하산이다.
6,400미터에서 꼼짝도 않고 체류한지 한 달. 고소에서 길 다면 긴 한 달 만에 내려가는 길은 몹시도 힘이 든다.
그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고 좁은 텐트 안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모든 근육이 굳어 버린 것 같다. 춥다고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하산하는 발걸음만큼이나 마음도 무겁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너무나 가깝게 보이는 정상과 로체 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내려 왔다.
이것이 완전 철수는 아니다. 기필코 정상을 오를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였다.
C1지역 까지는 그런대로 제법 빨리 내려왔다. 폐허 같은 C1 캠프싸이트에 도착을 하니 우리의 빈 텐트 2동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너무 추워서 텐트 안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지만 운행식이 없어 배가 고프다.
이번 등반 중에 대원들과 셀파들 모두가 운행 중의 중식 문제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국내에서 이것이야 말로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고 자랑하던 미군용 C레이션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큰 고통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 고소에서는 거의 먹지 못할 종류의 C레이션은 부피만 커서 나중에는 오히려 처치 곤란의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운행 중의 중식으로는 완전히 외면당했다.
이번 우리 대원들은 고산 경험이 거의 없는 멤버로 구성되어 있어 고산식량의 중요성은 책이나 보고서 정도로 간접 체험을 한 까닭에 운행식 준비에 완전히 실패를 하였다.
믿었던 선배의 책임 없는 조언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역시우리 당사자들뿐이다.
배가 고픈 것을 참으며 C1을 출발 하였다. 지난번 올라 올 때 혀 빼물고 고생하던 수직 벽을 내려 선 뒤 마침내 아이스폴 지역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아이스폴지역은 참으로 엉망진창이다. 설치했던 휙스로프가 눈이 무너지는 바람에
까마득한 크레파스 아래 묻혀 있는가 하면, 있던 길은 없어지고 없던 길이 새로 생기는 등 참으로 변화가 무쌍하다.
내 걸음이 너무 느려서 같이 가던 셀파를 먼저 내려 보내고 걷는 듯 쉬는 듯 하염없이 내려 왔다. 혼자 내려오다가 갑자기 크레파스가 무너지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까짓것 무너지려면 무너지라지. 성공도 못하고 내려가는 주제에…….
마치 죽음을 초월했거나 삶을 포기한 사람의 마음 같다.
아이스폴 중간쯤 내려가니 박성우 대원이 올라오고 뒤이어 장경순 대원이 보인다. 오래간만에 대장이 내려오니 마중을 나온 모양이다.
이곳부터는 벌써 피부에 닿는 바람결의 감각이 다르다. 표고차가 불과 몇 백 미터 밖에 안되는데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가 하고 신기할 정도다.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놓으며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베이스켐프가 너무나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렵하게 오르내리는 우리 대원들과 셀파들의 체력에 다시 한 번 놀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스까지 언제 내려가나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천신만고 끝에 베이스에 도착을 하니 기자들이 반갑게 맞아 준다.
단장님을 찾으니 텐트 안에 누워 계신다고 한다.
그전 같으면 “대장 왔냐?”하고 반겨 주실 단장님이 텐트 안에 누워 계신다니 어디가 편찮으신가 하고 깜짝 놀랐다.
단장님은 오늘 대장이 내려오니 마중하러 간다고 하시며 아이스폴 중간 까지 올라 가셨는데 너무 힘이 들어 포기를 하고 내려오는 길로 끙끙 앓고 계신다는 것이다.
텐트 자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누워서 얼굴만 쳐드시는데 흰 수염이 어지럽게 자라고 얼굴은 병색이 깊은 중환자의 모습이 틀림없다. 눈물이 핑 돈다.
위에서나 아래서나 고생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두들 이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은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정말 가슴을 칠 노릇이다.
C3로부터 시작된 철수 작업이 C2, C1을 거쳐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모두 끝나고 베이스에 전 대원이 모인 것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정말 오래간 만에 전 대원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였다. 이것이 정상 등정 성공후의 모임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1월 9일 (목)
이제부터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아주 중요하다. 자칫해서 철수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어 버리면 그 다음 부터는 수습이 안된다.
철수란 말은 아예 입에 올리지 않고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다음 공격 날짜 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이곳 셀파들의 얘기로는 지금 같은 날씨는 1월 20일이 지나야 좀 수그러들 것 같다고 한다. 고심 끝에 대원들의 휴식과 사기 진작을 위하여 고도가 낮은 아래 마을로 내려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대원들과 셀파들 모두를 남체까지 하산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 기회에 그사이 말썽을 피우거나 몸이 좋지 않은 셀파들을 정리하기로 하고 사다를 불러 인선 작업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의 경솔한 행동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는 것을 확실히 심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24명의 셀파중 7명을 추려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에 맞추어 식량, 연료 등을 체크한 뒤에 내려가는 길에 구입토록 하였다.
오늘이 1월 9일이니 동계등반의 시한인 2월 15일 까지 한달 이상을 더 버티려면 아무래도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5,400미터의 베이스 지역과 6,400미터의 C2지역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 1천미터의 차이는 우선 걸음걸이와 호흡 부터가 다르다.
베이스 지역의 기온이 영하 15도 인데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영하 30도에서 단련이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처음 베이스에 올라 왔을 때 단장님이 한가한 시간에 장기를 두자고 하여 마주 앉았는데 장기를 이기려고 깊은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술 먹은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리며 열이 뻗쳐서 결국 장기를 계속하지 못했다. 고소에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생각을 집중하다 보니 증가하는 산소 소모량을 감당하지 못하여 괴로워 진 것이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하는데도 많은 산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고소 증세는 참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온다. 본인들은 애써서 다른 핑계를 대지만 평상시와 다른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대부분 고소 증세 때문이며 그러한 증세들은 현재보다 낮은 고도로 내려가면 깨끗하게 낫는다.
두통이나 구역질이 나는 것은 기본이고 치통, 허리 아픈 증세, 기침, 어깨 결림, 관절통등 기타 평소에 안 나타나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대부분 고소 중세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제는 고소에 적응이 되고 나니 장기를 몇 판이나 두어도 아무렇지 않다.
박동석 대원의 동상이 걱정이 되던 참에 남서벽팀 대원중 침을 잘 놓는 친구가 있어 치료를 받았다. 잔뜩 부풀어 오른 귀와 코 부분을 침으로 터트리고 치료를 했는데 효과가 기대 된다.
원정대 인원 구성엔 현대의술을 아는 의사도 필요하지만 한의학 쪽 의사도 상당한 활용가치가 있을 것 같다.
1월 10일 (금)
아침에 일어나 텐트밖에 걸어 논 온도계를 보니 영하 20도이다. 텐트 안의 온도는 17도로 텐트 안과 밖은 3도 밖에 차이가 안 난다.
단지 텐트 안은 바람이 불지 않아 온도 차이가 많이 나고 보온을 했을 때 그 온도가 유지가 되어 따뜻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도 위에서 보다는 훨씬 났다. 우선 바람 소리가 아주 조용하다. 그전에는 상당히 시끄럽게 느껴지던 베이스 지역의 바람 소리가 C2에서 한동안 단련을 받고 온 뒤엔 조용하게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핑백 자크를 열고 상체만 내 놓은 뒤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면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하고 텐트 천정과 슬리핑백 위를 덮었던 하얀 서리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더 온도가 올라가기를 기다린 뒤에 버너 불에 슬리핑백이 안 닿도록 조심조심 하면서 침낭 밖으로 완전히 탈출을 한다.
추운텐트 안에서는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이 들고 번거롭다.
8시 반이 지나면 로체 능선을 간신히 넘어온 햇빛이 반가운 얼굴을 내민다. 계곡속의 C2에서는 9시 반이 지나야 햇살이 보였는데 이곳은 한 시간이나 빠르다.
히말라야에서의 음지와 양지의 차이는 엄청나다. 봄가을 시즌은 햇살이 비칠 때는 반팔 옷차림으로도 더위를 느낄 정도인데 햇빛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한겨울이 되어 버리는 극심한 온도 차이를 보인다.
매일 아침 햇빛을 기다리는 마음은 멀리 간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보다도 더 간절하다. 더구나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려면 햇살이 비치기를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
동계 등반 시 화장실 문제는 참으로 고민거리다. 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내 놓은 채 한참을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자칫 중요한 부분이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물건 구입을 위해 토요일의 남체 장날에 맞추어 내려 갈 수 있도록 김영대 대원을 아침 일찍 출발시켰다.
7명의 셀파를 불러서 해고 사실을 통보하고 퇴직금과 보너스로 원주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플라스틱 통을 하나씩 주었다. 우리가 가져온 큰 항아리만한 의료용 플라스틱 통은 이곳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인기가 최고다. 전에 사다인 앙리타가 플라스틱 통을 주지 않아 정상 공격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하던 바로 그 통이다.
내려가는 셀파들이 짐을 다 싼 뒤 한 사람 한 사람 짐 검사를 하였다. 너무 야박한 것 같지만 없어지는 물건들이 너무 많고 또 남아 있는 셀파들에게 경계심을 주기위한 본보기로 일부러 요란하게 검사를 하였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비누, 치약, 건전지, 기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많이도 나온다. 모두 압수를 하였다. 그들 중 푸리라고 하는 셀파가 있는데 계산을 하면서 대원들과 무언인가를 가지고 계속 논쟁을 하고 있다.
내용인즉 욕심이 많은 그는 등반 도중 외국 등반대가 놓고 간 물건들을 열심히 주워 모았는데 그의 개인 짐과 우리가 보너스로 준 통, 그리고 그동안 모아놓은 물건들을 합치니 다른 셀파들보다 짐이 훨씬 많아서 혼자 가지고 내려가기가 부담이되자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이 짐이 너무 많아 하산길이 오래 걸리니 포타비와 식비를 더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모두 너의 개인 짐인데 무슨 포타비를 달라고 하느냐 하며 대원들과 언쟁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대원중 성질이 급한 홍성암 대원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러면 우리가 준 보너스를 전부 내놓으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친구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잘못하다가는 보너스로 받은 통까지 빼앗길 것 같은 분위인지라 그제사 부랴부랴 짐을 챙긴 뒤에 허둥지둥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간다.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 뒤뚱거리며 내려가는 모습이 우스워서 모두들 한참을 웃었다. 사람들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과 계산을 할 수도 있는가 보다.
다른 대원들 보다 하루 먼저 단장님과 김창훈 기자가 오늘 하산하기로 했다. 그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단장님은 너무나 쇠약해 지셨다. 이번 기회에 아주 카트만두까지 내려가 계시도록 권했다. 그렇지만 단장님은 아무래도 이곳이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다.
1월 11일 (토)
오늘 나머지 대원들과 셀파들을 모두 하산토록 했다. 기자들은 어제 하산하신 단장님과 합류하여 카트만두까지 가기로 했고 대원들은 남체까지, 쿰중 근처가 집인 셀파들은 아예 집에 가서 쉬고 오도록 했다.
베이스에는 나 혼자 남기로 했는데 장경순 대원이 자기도 남아 있겠다고 자청을 한다. 괜찮으니 같이 내려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남겠다고 한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일이다. 눈과 바람속에, 영하 20도가 넘는 사람도 없는 쓸쓸한 곳에서 하루인들 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고마움으로 마음이 찡해 온다.
대원들과 셀파들이 한바탕 소란을 떨고 내려간 B. C 지역은 그야말로 있는 고독, 없는 고독이 밀물처럼 덮쳐 온다.
아직도 대원들과 셀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빈 텐트들은 바람에 펄럭이고만 있다.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석 달은 아무것도 아닌데 이국멀리 깊은 산속에서의 석 달은 마치 삼년은 된 것 같다. 떠나온 거리가 멀면 시간도 오래 된 것처럼 느껴지는가 보다.
검푸른 겨울 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새삼 너무나 춥다는 느낌이 든다.
1월 12일 (일)
오늘도 베이스 지역의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좋으나 정상 쪽의 제트기 폭음 소리는 여전하다. 장경순 대원과 비어있는 텐트들 중에 3동을 걷었다. 다시 올라오지 않을 사람이 11명이나 되니 빈 텐트만 남겨놓을 필요가 없다.
요즈음 들어 시력이 아주 나빠진 것 같다. 보이는 물체들이 2중으로 보이기도 하고 희미하게 보이기도하여 눈을 손으로 비벼 보았지만 마찬가지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탓인가 보다.
단장님과 둘이 쓰던 노란 색 2인용 던롭텐트는 처음에는 밝은 색이라 좋은 것 같더니 나중에는 햇빛이 비치면 눈이 피로하고 정신적으로 산만해져서 아주 피곤하다
장기적인 텐트생활을 할 때는 밝은 색의 텐트 보다는 어두운 색이 무난한 것 같다.
텐트를 거주성이 편하고 짙은 색인 텐트로 바꿨다. 텐트 안에 앉아 있기가 무료하여 밖에 나오니 대원들이 내려간 고락셒 쪽으로 눈길이 자주 간다.
텐트 안에 들어 간 장경순 대원은 무엇을 하는지 꼼짝을 안 한다.
1월 13일 (월)
할 일이 너무 없다. 가지온 음악테이프는 듣고 또 들어 가사를 전부 외울 정도다. 그나마 건전지가 부족해서 테이프도 마음대로 틀어 놓지를 못한다. 건전지를 소금물에 끓이면 충전이 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 시험적으로 해보았는데 별로다.
우리텐트 근처에 있는 남서벽팀 캠프에 놀러갔다. 멤버들은 모두 전진캠프에 올라가 있고 3명의 대원들만 남아있는데 지금 C1이상 지역은 바람이 몹시 불어서 등반을 포기하고 일주일후 철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박 대장은 지금 카트만두에 내려가 있어 부대장이 지휘를 하고 있다.
오후에 로라능선 쪽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커다란 눈사태가 났다. 휘날리는 설연이 참으로 장관이다. 저바람속에 휘말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속에 자연의 힘 앞에 우리 인간의 무력함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12월중에는 눈사태가 거의 보이지 않더니 1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저곳 크고 작은 눈사태가 밤 낮 없이 발생을 한다.
아이스폴 쪽은 어떨까 걱정이 된다. 어렵게 설치한 휙스로프들은 아이스폴이 무너지면 전부 다시 설치해야 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1월 14일 (화)
약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얼마나 지독한 바람이 불 것인가 염려가 된다. 예정보다 빨리 계절이 바뀌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은 남체에 먼저 내려간 김영대 대원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야크 편으로 올려 보내기로 한 날인데 저녁이 되도록 소식이 없다. 이제 석유도 다 떨어져 가는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저녁 식사 후 남서벽 팀 멤버가 놀러 왔다. 내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8일 베이스를 철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3팀 중 마지막 남은 우리가 꼭 성공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최선은 다하겠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마음이 무겁다.
1월 15일 (수)
흐린 날씨에 강한 바람이 하루 종일 불어댄다. 아이스폴 쪽은 가스가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햇빛이 없으니 텐트안도 무척 춥다.
11시경 김영대 대원이 사서 올려 보낸 물건들이 포타 2명과 야크 7마리에 실려 올라 왔다. 같이 올려 보낸 물품 명세서와 물건을 대조한 뒤 운반비를 지불하고 내려 보냈다.
딸랑 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내려가는 야크와 야크 주인이 부럽게 느껴진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뜻 밖에도 여러 명의 트레커들이 올라 왔다. 우리텐트 근처에서 추워서 잔뜩 웅크린 채 점심을 먹는 그들이 처량해 보인다.
서양 사람들은 등치가 커서 더 엉성하고 불쌍해 보이는 것 같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는 트레킹을 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날씨가 추워지면서는 부터는 아예 발길이 뚝 끊어졌다.
남체나, 탕보체 까지는 지금도 많이 올라오는 모양인데 베이스 까지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3시경 남서벽 팀의 박대장이 올라 왔다. 박 대장은 그사이의 경과와 앞으로의 계획을 자기 팀 멤버들과 숙의를 한 뒤에 우리 텐트에 와서 다시 부탁을 한다.
철수 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계속 캠프 전진을 할 예정인데 위에 있는 텐트들이 바람에 부서져 텐트 숫자가 부족해서 그러니 우리 것을 빌려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조금은 황당한 얘기다. 공격용 텐트는 우리도 그렇게 여유가 없고 지금 우리 텐트들도 계속 바람에 망가지고 날아가는 판에 텐트를 빌려 주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얘긴가?
박 대장에게 텐트 몇 동이 문제가 아니고 전체적인 계획을 현실에 맞추어 냉정하게 검토를 해보라고 충고를 했다.
1월 16일 (목)
아침에 일어나 텐트안의 온도계를 보니 영하 19도이다. 매일 아침 온도가 비슷하다. 시계를 보며 햇빛이 비치기를 기다린다. 8시 33분이 되자 로체능선을 살짝 넘어서며 환한 햇살이 베이스 쪽을 비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온 천지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하며 텐트안의 수은주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영하의 온도가 마침내 영상으로 올라서며 스리핑백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전혀 없고 햇볕이 따뜻하니 모든 일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정상 쪽의 팬텀기 폭음소리는 여전히 겁나게 들려온다. 한시도 쉬지 않고 계곡의 물소리처럼 끊임없이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이제는 친숙한 소리가 되었다.
낮에 오래간 만에 바람도 없고 햇볕이 따뜻한 날씨를 이용해 머리를 감기로 했다. 물을 한 양동이 데워서 대강 대강 머리를 감았지만 베이스에 올라 온 뒤 약 50일 만에 처음 감는 머리가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너무나 개운해서 “아이고 시원해”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이럴 때 따뜻한 물속에 몸을 푹 담글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더 이상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 타일렀다.
인체의 표피 수명은 25일에서 30일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너무나 추운 날씨로 인해 내복은 물론 양말도 제대로 갈아 신지 못하는데 오랫동안 신고 있던 양말을 벗고 내복을 걷으니 수명이 다된 살비듬이 소복이 쌓여 있다가 눈가루처럼 쏟아진다.
매끄럽던 살갗은 거칠기 짝이 없고 영양 결핍 탓인지 볼록했던 장단 지는 살이 쏙 빠져 내가 봐도 불쌍해 보인다.
그리고 엄청나게 빠지는 머리카락은 하산 할 때쯤엔 대머리가 되어 있을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들게 한다. 옷이며 슬리핑백과 매트리스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을 줍고 또 주웠다.
오후에 남서벽팀의 박대장이 왔다. 아무래도 모든 상황이 버티기가 힘들어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하며 지난번 C2에서 무릎 때문에 고생을 했던 대원을 데리고 오늘 하산을 하겠다고 한다.
선배님 팀은 꼭 성공을 하라고 당부하는 박 대장에게 부탁한 것을 도와주지 못한 것이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침에 캠프 철수를 위하여 다른 대원들은 전부 위로 올려 보내고 오후에는 대장이 부랴부랴 하산을 해야 하는 이유가 조금 이해가 안 된다.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간헐적으로 눈사태 소리가 들려온다.
1월 17일 (금)
며칠 조용하던 바람이 또다시 불기 시작한다. 날씨에 따라 이렇게 기분이 달라질 수가 있을까?
어제의 그 평화롭던 분위기가 오늘은 아주 엉망이다. 완전히 극과 극이다.
남서벽 팀은 22일 전원 하산 하기로 했다며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동안 위 캠프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한 모양이다. 그들의 무용담이 요란하다.
C2에서는 직벽 설치용인 BOX텐트를 치고 두 사람이 들어가 있었는데 강한 바람으로 인해 사람이 들어있던 텐트는 고정팩이 빠지면서 공중에 붕 떴다가 주저앉아 텐트가 부서저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었고 그 옆에 있던 빈 텐트는 바람에 날려 하늘 높이 올라간 뒤에 휙스로프에 매달려 펄럭이다가 폴들은 줄줄이 빠지고 로프가 끊어진 텐트는 어디로인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정말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가지 않는 얘기다.
아침나절 C4에서 암벽 등반을 하던 중 바람에 날아온 주먹만 한 돌을 맞고 크게 다쳤던 남서벽팀의 셀파가 베이스로 하산을 하였다. 이 환자를 아랫마을로 후송을 하는데 우리 셀파 2명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집이 멀어서 하산을 하지 않고 있던 셀파 두 사람을 불러서 아래 마을 까지 후송을 도와주라고 하니 별로 달가워하지를 않으며 응하지를 않는다.
할 수없이 야크를 불러 환자를 수송키로 하였다.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서 불러온 야크 2마리가 저녁에야 올라 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 내일 아침 내려가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도 이런 날씨에 무리하게 운행을 하지 않고 대원들을 하신 시킨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월 18일 (토)
밤새도록 불던 바람은 날이 밝아서도 계속되더니 오후 되어서야 간신히 조용해진다. 어제 밤엔 정상의 폭음소리가 상당히 아래로 내려 와서 들렸다.
남서벽 팀은 바람 속에 야크에다가 환자와 일부 짐을 싣고 하산을 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마지막 철수 준비를 하느라고 부산하다.
남체벽팀의 사다 얘기로는 25일경이 되면 제트기류가 물러날 것 같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의 말은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고도계의 기압표시를 열심히 체크해 보지만 그 역시 기상 상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이스에 세워 놓은 국기 게양대의 깃발은 바람으로 나무판처럼 빳빳하게 펴진 채 고정되어 있다.
1월 19일 (일)
바람이 비교적 조용하다. 아침 식사 후에 오래간 만에 고락셒 쪽으로 한 시간 정도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빙하 지역의 세락 형태가 처음 올라 올 때 보다 많이 바뀐 것 같다.
햇볕이 따뜻하여 텐트 문을 열어놓고 햇살을 즐기고 있노라니 주위에 있던 까마귀 들이 텐트 안까지 들어올 듯 가까이 다가와 먹이를 쪼아 먹는다.
심심풀이로 과자를 던져 주면 멀리 있던 까마귀들도 재빨리 몰려오는데 엄청나게 큰놈이 작은 놈을 밀어내고 자기가 먼저 먹는다. 까마귀 중 특별히 큰 이 종류는 보기에도 징그러운데 우는 것도 쉰 목소리가 나서 저승사자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떻든 까마귀들은 다른 새들에 비해 적응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베이스지역은 물론 텐트가 설치된 곳은 어디나 나타난다. 심지어는 8천 미터 싸우스콜까지 올라가고 중간에 데포 시켜놓은 짐들을 부리로 쪼아서 헤쳐 놓기도 한다. 아마 새들 중에서는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종류가 아닌가 싶다.
공기의 부력을 이용하는 헬기도 공기가 희박하여 6천 미터 이상은 올라가지를 못하는데 날개로 공기를휘저으며 8천 미터 이상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섭게 불어대는 바람과 엄청난 추위를 어떻게 견디는지도 신기한 일이다.
베이스 주변에는 까마귀 이외에 서너 종류의 새들이 있는데 가만히 관찰을 해보면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참새와 비슷한 새도 있고 또 어떤 놈은 공처럼 동그란 것이 마치 고무공이 통통 튀는 것 같아 신기하고 우습기까지 하다.
겨울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지역에는 몇 종류의 새들 말고는 생물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며칠 전에 아래 마을에서 개 세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이곳 까지 올라왔다. 낮에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가 밤이면 식당텐트 주위를 기웃거린다.
쿡이 개가 가까이 오면 돌멩이를 던지고 쫓아서 그런지 먹을 것을 주려고 불러도 절대 오지 않고 사람을 극도로 기피를 한다.
그런데 그 세 마리의 개중 한 마리가 결국은 얼어 죽고 말았다. 눈 속에 죽어있는 개를 보니 기분이 언짢다.
1시경에 뜻밖에도 김영대 대원을 선두로 대원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원래 내일 올라오기로 한 날인데 고소에 적응된 우리 대원들은 걸음이 빨라져서 일정 보다 하루 먼저 올라오게 되었다고 한다.
기본체력이 좋은 우리 대원들은 고소 적응이 되고 나서는 셀파들 보다 걷는 속도가 더 빠르다. 건강하고 밝은 모습들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흡족하다. 오래간 만에 왁자지껄 떠들고 웃는 모습을 보니 사람 사는 곳 같다.
“이 친구들아 뭐 하러 올라 왔어? 아주 한국으로 가 버리지.”
그래도 올라와 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 걱정했던 박동석 대원의 귀와 코의 동상도 상당히 좋아 졌다.
1월 20일 (월)
셀파들에게도 대원들과 같은날인 오늘까지 올라오도록 했는데 핀조 한명만 올라오고 나머지는 깜깜 무소식이다. 셀파들이 혹시 작당을 한 것이 아닌가 또 그들 때문에 등반시기를 놓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셀파들은 가까이 하기도 멀리 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다. 서로간의 입장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그들의 행동은 절대 장담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단순하고 순진한 면은 있지만 그 대신에 너무 우직하여 어린애들 같이 자기들 입장만 고집하고 조금이라도 손해가 난다 싶으면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이곳 사람들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마을에서 이곳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살인 사건이 생겼다고 한다. 얼떨결에 살인을 한 범인은 겁이 나서 멀리 도망을 갔는데 뒤쫓아 간 순경이 결국은 범인을 체포하였다. 범인을 호송해 와야 하는 순경은 며칠 걸리는 산길을 무거운 총을 메고 와야 할 생각에 고민을 하다가 나름대로 좋은 방법을 찾아 내었다. 범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억울한데 무거운 총을 메고 가는 것은 더욱 억울하니 네가 이 총을 대신 가지고 가라고 하며 범인에게 총을 맡긴뒤에 경찰서 까지 편안하게 왔다는 얘기다. 이곳 사람들이 그만큼 순진하다는 얘기다.
베이스 지역의 날씨는 느낌상으로는 계절이 봄 쪽으로 가는 듯 한 기분이 드는데 정상 쪽의 바람소리는 조용해 질 줄 모른다.
정말 지긋 지긋한 바람이다. 한국을 떠날 때 유행하던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유행가 생각이 난다.
1월 21일 (화)
남서벽 팀은 철수 준비에 부산하다. 그들에게 카트만두에서 돈이 부족하다고 하여 대납해준 입산료 대신에 산소 봄베 8병을 받았다.
모든 장비나 식량은 올라올 때도 운반비가 들지만 남아서 가지고 내려갈 때도 운반비가 든다. 왼 만한 물건은 하산비가 물건 값과 비슷하게 들어 할 수 없이 이곳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팔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 약점을 잘 아는 이곳 사람들은 비싼 가격으로 먼저 사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자기들에게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 때는 제값의 1/10도 받기가 힘 든다. 그것이 등반에 성공을 했을 때는 큰 상관이 없지만 실패를 하고 철수를 할 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얘기다. 남아도 걱정 모자라도 걱정인 것이 원정대의 짐이다.
오후에 셀파들이 전부 올라 왔다. 하루 늦게 올라 왔지만 다 와 준 것이 큰 다행이다.
왜 늦었냐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반갑다고 인사를 하니 자기들도 조금은 미안한 모양이다.
잘못했을 때 꼭 야단을 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1월 22일 (수)
장경순, 김영대 대원이 셀파 3명과 같이 C1에 올라가 텐트를 설치하고 돌아왔다. 하루에 C1까지 올라갔다가 캠프 설치를 하고 돌아올 정도로 우리의 대원들은 고소에 충분히 적응이 되었다.
히말라야에서의 고소 적응 문제는 정상 공격 성공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등반대는 하루에 고도 500M 이상 진출은 삼가하고 있는데 한번 고도를 높인 뒤의 적응기간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적어도 약 사흘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이제 등반대의 성격이 대규모 등반대 보다는 등반 능력이 뛰어난 한 두 사람이 고소 적응을 충분히 한 뒤 며칠 만에 후닥닥 8천 미터 고봉을 해치우는 알파인 스타일이 많은데 우리 대원들을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간밤에 불던 바람이 낮에까지 계속되어 운행에 애를 먹은 모양인데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캠프 설치는 빨리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이스폴 상태가 전보다 아주 나빠졌다는 보고에 마음이 불안하다. 오늘 남서벽 팀이 완전히 철수를 하는 날이다.
같이 점심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얘기들을 나누었다. 철수하는 팀이나 남아있는 팀이나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1월 23일 (목)
계속 강한 바람이 분다. 망가진 아이스폴 루트를 보수하기 위해 김종호, 장경순, 박성우 대원이 셀파 4명과 같이 아침에 출발을 했다.
보수할 부분이 많아 상단 부는 장경순, 박성우 대원이 맡고, 하단 부는 김종호 부대장이 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어려워진다.
아이스폴이 계속 무너지기 시작하여 어제 멀쩡하던 곳이 오늘 가다보니 무너져 버려 아침에 홍성암, 김영대 대원이 C1까지 진출키로 하고 출발을 하였다가 올라 가지를 못하고 되돌아 왔다.
그동안 가장 문제가 되었던 운행식을 식량담당 박동석 대원에게 책임지고 방법을 강구해 보라고 지시를 내렸더니 궁여지책으로 도넛을 만들었는데 대원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써먹을 메뉴는 아닌 것 같다. 어떻든 이번 운행 식은 대 실패다.
1월 24일 (금)
아침나절 춥던 날씨가 햇빛이 나면서 완전한 봄 날씨가 되었다. 김종호, 홍성암, 김영대, 박성우 대원과 4명의 셀파가 아이스폴 마지막 보수를 위하여 출발을 하였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아이스폴 하단 부는 눈과 얼음이 녹아 개울물 흘러가듯 물이 흐른다. 이렇게 눈이 녹기 시작하면 아이스폴 지역은 불안해 진다. 계절은 어느덧 봄으로 바뀌는 것 같은데 모든 상황은 우리 등반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위에 올라간 김 부대장으로부터 C1직전 수직 벽 윗부분이 엄청나게 무너져 길이 완전히 없어 졌다는 보고다.
내일은 C1까지, 모래는 C2까지 진출할 예정이었는데 모든 계획이 나무아미타불이다. 내일 다시 방법을 찾기로 하고 모두 철수토록 했다.
저녁 식사 후 사다인 앙리타가 내 텐트로 찾아왔다.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 꺼내더니 어렵게 하는 말이 내일이 보름인데 이곳 라마사원 스님이 예언하기로는 이번 보름날 큰 지진이 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큰 지진이 나면 아이스폴 지역도 무너지기가 쉬운데 그런 상황에서 아이스폴지역 보수작업은 너무나 위험하니 내일 하루 쉬게 해주면 앞으로는 쉬는 날 없이 계속 일을 하겠다고 사정을 한다. 그런데 언제 사다가 스님을 만나고 왔는지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사다가 직접 나한테 어렵게 얘기를 할 때에는 벌서 자기들끼리는 의견 통일이 되었다는 것인데 더 버틸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판에 셀파들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면 억지로 일을 해봐야 잘못하면 역효과만 난다.
대원들도 내가 무어라고 하나 눈치를 살핀다.
아무려면 내가 고명한 라마승을 이길 수 있겠는가. 내일은 푹 쉬라고 지시를 하고 나니 내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 진다. 어차피 정상을 올라가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겠는가?
1월 25일 (토)
셀파들이 하늘처럼 믿고 있는 라마승도 실수할 때가 있는 모양이다. 지진은커녕 평소에 잘나던 눈사태 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아까운 하루를 그대로 보낸 것 같아 은근히 약이 오른다. 그래도 내색을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다행스럽게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직도 한번 해보자는 의욕이 넘쳐 난다. 원정 기일이 예정보다 많이 길어지고 있지만 대원들은 전혀 내색을 안 하고 맡은 일들을 자기들이 알아서 열심히들 하고 있다.
오히려 대원들 중 박동석 대원은 동상으로 인해 운행에 참석을 못하고 있는 것을 말은 안하지만 혼자서 답답해 죽겠다는 눈치다.
대원들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어떤 원정대의 경우엔 대원들 간의 알력으로 등반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는 참으로 일사불란하게 잘 움직이고 있다.
운행도 대부분의 경우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 나의 경우도 가능하면 명령보다도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신경을 썼다.
“내일 운행은 누구지?" 알면서도 물으면 몸이 조금 불편해도 ”접니다“ 라고 선뜻 대답을 한다.
본인도 어차피 할 일이라면 시켜서 하는 일 보다는 자진해서 하는 것이 기분 좋은 법이다.
등반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전 대원의 팀워크가 이루어 져야 한 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일들이 잘 안 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1월 26일 (일)
하루 종일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홍성암, 장경순, 김영대 대원과 4명의 셀파가 아이스폴 보수를 위해 무리해서 출발을 하였다.
오늘도 길은 완전히 뚫지를 못했고 추위에 장경순 대원은 발에 약간의 동상을 입었다. 우리가 이번에 사용하고 있는 플라스틱 코브라는 이중으로 되어 있지만 보온력은 가죽 신발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이런 동계에는 오히려 가죽제품이 났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C1도 올라가지 못하고 고전을 하면 언제 정상을 올라갈 것인가 고민이 되기 시작 한다. 벌써 등반을 다시 시작한 것이 일주일이 다되어 가는데 이러고 있으니 한심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올라갈 수도 없고 기약 없이 앉아 있어야만하니 답답한 마음에 하늘만 쳐다보게 된다.
1월 27일 (월)
김종호, 장경순, 박성우 대원에다가 참다못한 박동석 대원까지 참여하여 바람 속에서 무리를 하며 작업을 한 덕으로 마침내 C1까지 루트 공작이 끝냈다.
박동석 대원을 오래간만에 작업에 내보내며 동상부분을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본인은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신이 났는지 아니면 혹시나 내가 부를까봐 그런지 뒤도 안돌아 보고 앞에 서서 부지런히 올라간다.
저녁때 돌아온 뒤에도 별 이상이 없어 안심을 하였다. 애써서 작업한 것이 밤사이에 또 무너지지나 않을까 밤새 걱정이 되었다.
1월 28일 (화)
마침내 홍성암, 김영대 대원이 C1까지 진출을 하였다. 걱정과는 달리 아이스폴지역은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참으로 어렵게 C1까지 진출을 한 셈이다.
C1과 무전 교신을 하며 위의 상황이 어떤가 살펴보라고 하니 루트 정찰 후 C2까지는 무난하리라는 연락이 왔다. 조금은 안심이 된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흘러가는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 맑았던 하늘이 잠시 후엔 구름으로 꽉 덥혔는가 싶으면 또 어느새 파란 하늘이 보인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속도가 너무 빨라서 흘러가는 구름이 어지럽게 느껴진다.
새삼 날짜를 꼽아 본다. 바람과 싸우다 보니 어느새 1월도 다지나갔다. 동계시즌 기한이 2월 15일 이니 앞으로 등반을 할 수 있는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즌이 지나서도 계속 등반을 하려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다른 팀들이 벌써 허가를 받아 놓아서 우리는 해당이 안 된다.
이런 기상조건으로 앞으로 운행을 할 수 있는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될 것인가 자꾸만 마음이 어두워진다.
대원들과 셀파들 모두가 이제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대원들이야 사명감과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하겠지만 셀파들이야 단지 돈 때문에 참여를 하고 있는데 이런 등반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 얘기로는 다른 팀 같으면 벌써 포기를 하고 내려가도 벌써 내려갔을 텐데 이 팀은 어떻게 된 것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제발 좀 포기하고 내려갔으면 하는 눈치가 역역하다.
1월 29일 (수)
밤새 바람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보라가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다. 오늘 C2까지 진출할 예정이었는데 할 수없이 전 캠프 운행을 정지했다.
텐트 안에 갇혀 있기는 베이스나 C1이나 마찬가지인데 C1에서는 더욱 답답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여기는 C1 베이스 응답하라”
“여기는 베이스 감 좋다. 지금 C1은 어떤가? ‘
“눈보라 때문에 텐트 밖으로 얼굴도 내밀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루 종일 누웠다 앉았다 하고 있는데 할일도 없고 답답해 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답답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정 죽겠으면 둘이서 가위바위보해서 지는 사람 뺨 맞기나 해라 조금 정신이 날거다”
할 얘기가 없으니 실없는 얘기나 하고 있다.
텐트에 갇혀 며칠이고 있을 때는 참으로 지루하기가 짝이 없다. 화제도 다 떨어져 할 얘기도 없으니 멍하니 앉아 있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외부와 단절되다 보니 사고력도 떨어지는 모양이다.
1월 30일 (목)
오늘도 아침에 날씨가 좋지를 않았지만 몰아내듯 C2로 셀파들을 출발 시켰다. C1에서도 홍성암, 김영대 대원이 C2를 향해서 출발했으나 50M도 가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다는 얘기다.
B. C를 출발한 셀파들도 C1까지는 겨우 도착을 했는데 더 갈 수가 없어 일부는 C1에 머물고 나머지는 베이스로 돌아왔다.
눈이 오는 것인지 온 눈이 바람에 날리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데 적설량이 늘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신설은 아닌 것 같다.
바람! 바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나는 정말 바람이 싫다.
1월 31일 (금)
1월의 마지막 날. 바람은 여전히 강하게 불지만 다행히 날씨는 맑아 각 캠프의 운행을 강행 했다.
베이스의 김종호, 박동석 대원은 C1까지 올라갔고 C1에 있던 홍성암, 김영대 대원과 4명의 셀파는 C2로 올라갔다.
C1에 올라간 대원들은 지난번 내려올 때 묶어 놓았던 소형텐트들을 다시 설치하고 식당용 폴라텐트는 너무 망가져서 중간 폴을 낮춘 채 경우 형태만 갖추어 식당용으로 사용토록 하였다는 보고가 왔다.
어제 운행을 하지 않은 핀조 셀 파를 김 부대장의 C1 진출 시에 짐 수송을 위해 같이 출발 시켰는데 아이스폴 중간에서 넘어져 부상을 당해 내려 보낸다는 무전 연락이 왔다.
“여기는 C1 운행조, 지금 핀조 셀파가 너머저서 조금 다쳤습니다. C1까지 운행이 어려워 하산을 시키겠습니다‘
“부상 정도는 어떤가? “
“예 그렇게 심한 것 같지 않아 혼자 내려 보내겠습니다”
베이스는 비상이 걸렸다. 장경순 대원에게 약품을 준비 시키고 긴장한 채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베이스에 도착한 그를 보니 심하게 절룩거리며 얼굴을 잔뜩 찌푸린 모습이 많이 다친 것 같다. 쿡, 키친보이등 베이스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이 모두 나와 걱정스럽게 둘러보는 가운데 치료를 하기 위해 아픈 부분을 물어보니 팔을 들기도 힘이 드는 듯 간신히 손을 들어 오른쪽 무릎을 가리킨다. 그래서 무릎이 아픈가 했더니 무릎을 가리키던 손가락은 다시 천천히 허벅지를 지나고 가슴을 지나더니 머리끝까지 간다. 그러더니 다시 내려와 어깨를 거쳐 허리, 장딴지, 발끝까지 갔다가 다시 아까 그 부위 까지 되돌아 왔다. 결국 오른쪽 반이 전부 아프다는 얘긴데 이상해서 바지를 걷게 하였더니 소리를 지르며 손도 못 대게 한다.
무릎이 많이 으깨져서 출혈이 낭자할 것을 예상하고 억지로 바지를 걷게 했으나 별 이상이 없다. 아픈 부분이 보이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오른쪽 무릎 위에 아이젠 발톱으로 찍힌 자국이 보일 듯 말 듯 나있다. 긴장했던 모든 사람들은 기가 막혀 모두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도 본인은 심각한 얼굴을 하며 계속 몹시도 아픈 표정을 한다. 엄살 치고는 너무했다. 장경순대원이 빨간약을 적당히 발라주고 치료를 끝냈다.
오늘은 일단 C2까지 진출을 했으니 큰일을 한 셈이다.
2월 1일 (토)
새벽 까지 심하게 불던 바람이 7시경부터는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2월의 첫날. 2월로 들어서며 기대했던 대로 날씨가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가 된다.
원래 히말라야 지역의 몬슨은 11월에서 2월까지 이지만 우리의 등반을 위해서 제발 빨리 좀 이 계절풍이 물러가 주기를 바랄뿐이다.
날씨에 따라 기분도 완전히 180도 달라진다.
C1, C2와의 교신을 해보니 그곳 날씨도 아주 좋다고 한다. 모두들 활기가 넘친다. C1에 있던 대원들과 셀파들 그리고 짐들을 모두 C2로 옮겼다.
이제 C2에는 김종호 부대장을 비롯하여 홍성암, 김영대, 박성우 등 4명의 대원과 셀파 4명, 키친보이 1명 등 9명의 인원이 집결하였다.
어제 C2로 올라갔던 김영대 대원은 아침에 셀파 1명과 같이 설원 끝에 있는 베르그슈른트까지 정찰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사이 우리가 수없이 지나다니던 길에서 그동안 보지 못하던 시체가 노출되었다는 보고를 해왔다.
지난 가을 인도 육군 팀이 정상 공격을 하고 내려왔는데 싸우스콜에 있던 텐트가 폭설로 망가지는 바람에 하산을 못한 대원 5명은 그곳에서 전부 사망을 하였다. 그중 장교 1명은 본국으로 후송을 하고 나머지 4구의 시체는 아래로 굴린 뒤 시신을 설원지대의 눈 속에 묻고 갔는데 겨울철 계속되는 바람으로 쌓였던 표면의 눈이 다 날아가 버려 마침내 시신이 노출된 것이다. 입은 옷 그대로 웅크린 채 굳어있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우리 입장에서는 손을 댈 수가 없어서 그대로 방치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베이스의 장경순, 박동석 대원은 불안한 아이스폴 보수 작업을 하였다.
2월 2일 (화)
바람이 없는 조용한 아침이다. 텐트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따뜻한 햇볕과 더불어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정상 쪽의 여전한 폭음소리만 아니면 더없이 좋은 날이다. 계속적인 운행으로 너무 지쳐 오늘은 전 캠프 휴식이다. 등반이 장기화됨에 따라 가장 큰 문제는 대원들과 셀파들의 피곤함이다. 특히 기본 체력이 약한 셀파들은 그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C1, C2에서 아무렇지도 않던 셀파들이 고산증세로 베이스로 하산하는 일이 이제는 자주 생긴다.
오늘 C2에 있던 다와타망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베이스로 하산 시켰다. 운행속도도 현저히 떨어지고 이제는 대원들이 오히려 더 낳은 편이다.
루크라에 내려갔던 메일런너 파상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가족들과 친지들로부터 격려의 편지가 많이 와서 편지를 받을 때마다 환호하고 즐거워했는데 이제는 편지 한 장 오지 않아 실망들이 크다.
그사이 편지를 받은 횟수를 대원별로 구분해 보면 신기하게도 나이와는 정 반대다. 재학생 막내인 박동석, 박성우 두 대원이 가장 편지를 많이 받았고 그 다음이 김영대 대원 순인데 위로 올라 갈수록 숫자가 적어져 단장님의 경우엔 사적인 편지는 한통도 받지 못했다. 그 바람에 메일런너가 오는 날이면 설움 아닌 설움을 받으셨다.
위험하고 삭막한 주위 환경 속에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의 편지이고 특히 총각들은 여자 친구의 편지가 오면 단연 인기로 옆에 있는 사람들 까지 덩달아 좋아한다.
박성우 대원의 경우 출국 전에 미팅을 한 1학년 여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와서 본인도 감격했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흥분하는 바람에 한동안 베이스캠프 전체 골짜기가 시끌벅적하였다.
편지 한 장 못 받은 단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바람에 한마디 했다.
“아니 왜 단장님이 더 좋아 하고 난리이십니까?”
단장님은 쑥스러운 듯 주먹을 쥐고 휘둘러 댄다.
장기간 고산에 올라와서 눈과 바람과 추위와 씨름을 하다 보니 본인도 모르게 마음이 여려 지는 모양이다.
등반 대원중 성격적으로 예민하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이런 환경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증세가 심하면 본인은 물론 다른 대원들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대장은 이럴 때 분위기를 잘 파악하여 미리 조처를 취하여야 하지 타이밍을 놓치면 아주 힘들어 지게 된다.
이번 우리 등반대의 경우 이런 점에 있어서는 어느 팀보다도 적응을 잘 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 대원들의 사기 문제나 투지도 끝까지 변화가 없어 대장으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2월 3일 (월)
바람이 없어 조용한 날씨인데도 상당히 춥게 느껴진다. C2에 짐 수송을 위하여 앙까미, 마일라가 아침 7시 베이스를 출발 하였고 장경순, 박동석 대원도 아이스폴 보수를 위하여 마리라타망, 핀조를 데리고 9시경 뒤따라 출발을 하였다.
C2의 홍성암, 김영대 대원은 3명의 셀파와 같이 C3 캠프 설치를 위하여 떠났으나 C3 도착 시간이 너무 늦어 가지고간 짐만 데포 시켜 놓고 서둘러 하산을 하였다.
C3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정상과 싸우스콜 쪽은 여전히 바람소리가 굉장해 정상 공격은 어렵겠다는 보고를 해온다.
마음이 우울해 진다. 정상 공격이 안 된다면 C3고 C4에 올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이스폴 작업을 나갔던 박동석 대원은 큰 사고가 날 번했다. 작업을 끝내고 셀파들 보다 앞서 내려오던 박대원은 아이젠 한쪽이 부러져 다른 한 쪽 만으로 불안하게 내려 오던 중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져 크레파스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순간 다행이도 늘어져 있던 휙스로프를 잡고서 간신히 매달리게 되었는데 불행이도 발 밑 부분이 허공이라 로프에 매달린 채 발만 허우적 거릴 뿐 올라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뒤쫓아 오던 셀파들이 달려와서 도와주려 했으나 손은 닿지 않고 다른 방법이 없어 급한 김에 주위에 있던 사다리를 가져와서 발밑을 바쳐 주려했으나 밑이 허공인관계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매달린 팔의 힘은 점점 빠져가는 절박한 상황이 되고 말았는데 이제 힘이 다하면 결국 손을 놓고 떨어져야만 한다. 크레파스 밑은 보이지도 않거니와 뾰죽 뾰죽한 얼음들이 솟아있는 곳으로 떨어지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순간이었다.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박동석 대원은 그 순간 믿지 못할 행동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불가능해 진 것을 알고 늘어진 로프를 잡고 사력을 다해 몸을 끌어올리던 그는 마침내 아이젠 신은 한쪽발로 설벽을 찍는데 성공을 하였고 죽을 힘을 다하여 위로 올라운 그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워낙 힘이 좋고 빙벽, 바위에 능한 박 대원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결국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뒤늦게 쫒아온 장경순 대원이 놀래서 박동석 대원을 부축을 하며 베이스로 내려 왔다. 그렇지 않아도 하산시간이 늦어 걱정하고 있던 차에 뒤 늦게 내려온 대원들에게 사고 얘기를 들은 뒤 가슴을 쓸어 내렸다. 텐트 안에서 박동석 대원의 팔을 보니 힘줄이 늘어난 듯 팔이 뚱뚱 부어올랐다.
현장에 같이 있던 셀파들은 박 대원을 “스트롱 맨”이라고 부르며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곳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이다. 운행중에는 매사 조심을 해야 하겠지만 조심을 한다고 사고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다.
2월 4일 (화)
밤부터 그 지겨운 바람은 또다시 극성스럽게 불어댄다. C2는 바람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한다. 역시 계의 현상은 어쩔수 없는지 아마도 2월이 완전히 지나야 바람이 조요해 질 모양이다.
오늘은 날씨도 좋지 않은데 트레커 두 사람이 포타 1명과 같이 올라 왔다. 이런 겨울철에 베이스지역까지 트레킹을 오는 사람들은 참으로 극성맞은 사람인데 외지 사람 구경하기가 힘든 이곳에서는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겨울철 트렠킹은 날씨나 고소도 문제지만 고락셒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가을이면 철수를 해서 마지막 숙소도 문제다. 더 아래 로부제에서 하루에 왕복을 하던가 아니면 중간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일정상 무리가 온다. 베이스에 처음 도착한 11월 말 경만해도 트레킹을 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었는데 겨울이 깊어지며 올라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오늘 올라온 사람들은 캐나다 사람들로 6개월째 세계를 여행 중이며 직업은 호텔 종업원이라고 한다.
여러 번 느끼는 점이지만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6개월이고 일 년이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여행을 하면서 다 쓴 뒤에 다시 돌아가서 다음 여행 경비를 위해서 다시 일을 하는 그들을 보면 어떻게 보면 아주 낭만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살다가 좋은 사람 있으면 부담 없이 동거를 하는 그들, 이곳 카트만두 롯지에 가보면 여행 파트너를 구하는 쪽지가 롯지 현관 게시판에 많이 붙어있다. 파트너는 이성이어야 한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트레킹을 같이 다니는데 비용은 물론 지고 가는 짐도 철저하게 각자가 책임을 진다.
지난번 봄, 답사 시에 지리에서 이곳 베이스까지 보름간 트레킹을 하는 동안 쌍쌍이 여행을 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처음에는 전부 애인이나 부부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나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라는 것을 알고 놀랬던 일이 생각난다. 이세상의 모든 일은 내 기준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보다.
부식이 부족해서 파상을 로부제에 내려 보냈다. 오래간 만에 영양보충을 위해 야크 고기를 사오도록 했는데 다리 하나에 900루피 (약 3만 6천원) 라고 한다.
2월 5일 (수)
바람은 여전하다. 아이스폴 위 지역은 눈보라에 가려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석유가 얼마 남지 않아 남체까지 내려가서 사와야 하는데 등반 제한 일자와 사와야 할 수량이 조금 애매하다.
오늘 내려가면 빨라도 10일이 지나야 올라 올 텐데 등반이 끝나가는 시기에 석유 몇 통 사자고 내려가는 길이 너무 멀다. 그렇다고 이 추운 곳에서 취사에 필요한 석유도 없이 그대로 버틸 수도 없는 일이아닌가.
그동안 공격 조에서 제외된 채 아이스폴 작업만 하느라고 풀이 죽어있는 박동석 대원을 기분전환도 시킬 겸 남체로 내려 보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인지 주위 환경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 팀의 형편으로 봐서는 체력도 좋고 고소 적응이 잘된 박동석 대원을 공격조로 내보내는 것이 좋겠지만 동상 후유증이 걱정이 되어 참가시키기가 주저된다.
눈보라 속에 휘날리는 깃발들이 오늘따라 더 요란스럽다. 깃발을 매달아놓은 게양대가 자꾸만 넘어져 돌을 가져다 다시 고정을 시켜 놓았다.
2월 6일 (목)
계속되던 바람이 오후 되면서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C2에 있던 김영대 대원은 젖은 침낭을 말리려고 텐트위에다 끈으로 묶어서 널어놓았는데 바람에 날아가 버려 침낭을 찾으려고 C1까지 내려갔었다고 한다. 눈밖에 없는 허허 벌판에 파란색의 침낭이 눈에 잘 띨 만도한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침낭 없이 버틸 재간이 없어 결국 베이스로 하산토록 했다. 나중에는 별일이 다 생긴다.
내일은 무리를 해서라도 C3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김종호 부대장과 통화를 했다. 날자가 얼마 남지 않아 이제는 완전히 쫓기는 기분이다.
2월 7일 (금)
또다시 불기 시작하는 바람 때문에 C2진출은 또 중단이 되고 말았다. 허구한 날 텐트 안에 쪼그리고 앉아 바람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하는 신세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소에 장기 체류한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를 않아 몸이 굳어서 정작 운행을 하려면 아주 힘이 든다. 운동을 하고자 해도 밖이 너무 추워서 꼭 필요한 운행이 아니면 나가게 되지를 않는다.
이제는 싫어도 철수 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철수를 할 때는 등반이 끝났다고 자기 짐만 싸가지고 내려갈 수는 없다. 각 전진 캠프의 철수는 물론 아이스폴에 설치한 래더의 회수도 문제고 베이스에 있는 모든 장비, 식량 등을 정리해서 집결 시킨 뒤 하산에 필요한 포타와 야크의 사전 수배, 그리고 필요 없는 장비, 식량의 처분 등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하자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모든 내용이 파악이 되어 수배 및 물건 처분을 위해 사람을 아래 마을로 보내야 한다.
저녁때 C2에 있던 사다가 할 얘기가 있다고 베이스로 내려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제 동계등반 허가 기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만일 등반 기일을 넘기고도 등반을 계속하려면 남체에 머물고 있는 정부 연락관에게 보고를 하고 미리 양해를 받도록 자기가 편지를 써 주겠다는 것이다.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 그래서 그 것 참 좋은 얘기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정부 연락관에게 편지를 쓰기를 자기들은 2월 15일이 지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등반을 계속할 수 없다는 내용을 적어서 보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친구다.
앙리타 라고 하면 셀파세계에서는 신화적인 존재이고 세계의 각 등반대에서도 그를 등반 파트너로 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참으로 해도 너무했다. 아니면 우리가 정상이 아닌 것인지?
2월 8일 (토)
아침에 일어나 텐트안의 온도를 체크해보니 영하 16도이다. 그래도 전보다 기온이 많이 올라간 셈이다.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며 기온은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해가 비치는 각도가 상당히 높아져 계절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어제 BC로 하산했던 사다가 오늘 수면 마스크 2개를 가지고 C2로 올라갈 예정이었는데 우물쭈물하며 올라갈 생각을 안 한다. 빨리 올라가라고 하니 내일 올라가면 안 되겠느냐고 한다. 내일 C3로 진출을 하려면 오늘 C2까지 가 있어야 하니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을 하니 아이스폴이 위험해서 혼자서는 못 올라가겠다고 발뺌을 한다.
화가 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셀파 4명을 동행시켜서 두 사람은 아이스폴을 보수토록하고 두 사람은 C2까지 같이 동행하도록 해서 간신히 올려 보냈다.
어제 내려올 때는 혼자서 잘도 내려오더니 올라갈 때는 위험해서 못 올라가겠다는 친구를 셀파 대장이라도 믿고 고용을 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등반 의욕이 완전히 떨어진 것 같다.
요즈음 치통으로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며칠째 고생을 하고 있는 장경순 대원을 루크라로 하산토록 했다. 체력이 떨어지면서 고산 증세가 오는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에 우리 팀의 철수 시에 카트만두까지의 비행기 예약과 회수한 사다리, 그리고 남은 장비, 식량 등의 판매 문제 등을 알아보도록 지시를 하고 치통으로 인한 고소증세를 치료 하도록 했다.
루크라에서는 관광객이 밀릴 경우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일주일씩 대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미리 체크를 해두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루크라에서 카트만두 까지 헬기 사용 가능성도 알아보도록 했다.
이제는 어느새 하산을 위한 준비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2월 9일 (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람은 조용하다. C2에 있던 김종호, 박성우 대원이 C3로 진출을 하는 날이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없지만 정상 쪽의 폭음소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정상에서 들리는 저놈의 소리가 안 들려야 하는데 아직도 끊임없이 들려오니 참으로 답답하다. 10시 반 C2를 출발할 무렵 정상과 로체 쪽에서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오후가 되면서 아이스폴 위쪽은 완전히 구름에 가려 보이지를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날씨가 나빠지기 위한 조짐인지 바람이 조용해지기 위한 징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이번이 아무래도 마지막 공격의 기회인 것 같다. 시간이 있을 때 하산준비를 위해 베이스의 짐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가지고 내려갈 물량을 정확히 파악해야 싣고 내려갈 야크 숫자가 결정이 되고 또 미리 수배를 해야 일이 쉬워 진다.
5시경 C3에 도착을 했다는 김 부대장의 무전 연락이 왔다. 지금 C3는 약간의 눈발이 날리고 있다고 한다. 이제부터 2-3일간의 날씨는 우리의 이번 등반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내일 날씨가 몹시 신경이 쓰인다.
2월 10일 (월)
바람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고 잠을 설쳤다. 새벽녘에 바람소리가 조용해져 이제는 됐구나하고 6시에 텐트 문을 열어보니 아이고 맙소사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다. 이런 눈은 작년 11월 이곳 베이스에 들어온 이후 처음 보는 눈이다. 그사이는 바람으로 인해 쌓인 눈이 날리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바람도 없는 가운데 조용히 내리는 신설을 보니 이제는 몬슨이 물러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7시의 C2, C3와의 교신에 의하면 위에서는 지금 강한 바람과 함께 폭설이 내리고 있어 운행이 도저히 어렵겠다는 것이다. 5천대와 6,7천대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기상상태를 계속 보아 가며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아! 하필이면 이때에 눈이 내릴 것이 무엇인가? 너무나 답답하여 가슴을 처 보지만 별도리가 없다. 결국 오늘 운행은 포기다. 달력을 보며 날짜를 꼽아본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2시경 84년 동계 양정팀 사다였던 학파겔젠이 야크에 석유를 사가지고 올라왔다. 이어서 내려갔던 박동석대원이 올라와서 카트만두에 가 계셨던 김상겸 단장님과 정성근 기자가 루크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눈이 하루 종일 내려 저녁 무렵엔 베이스 지역도 발목까지 눈이 빠진다. 저녁 교신에 C3의 셀파 2명이 C2로 내려 왔다는 보고가 왔다.
올라가야할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으니 이제는 아무래도 끝이 난 것 같다. C3도 내일이면 식량과 연료가 다 떨어져서 공급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런 날씨에 내일 올라갈 수가 있을까 걱정이 된다.
마음만 한없이 무거워 진다.
2월 11일 (화)
걱정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친 뒤 아침 6시 텐트 밖을 내다보니 뜻밖에도 맑은 하늘이 보인다. 바람도 조용하고 눈도 그쳐 아주 좋은 날씨이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 7시에 C3에 있는 김종호 부대장과 통화를 했다.
“이곳 베이스 지역은 날씨가 아주 그만인데 그곳은 어떤가?”
“예, 이곳은 하늘이 맑기는 한데 바람이 몹시 불고 있습니다.”
가슴이 뜨끔 한다.
“운행하기엔 어떻겠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아무래도 싸우스콜 진출이 어렵겠습니다.”
좋은 날씨로 흥분이 되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는다.
“아니, 이곳은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
혼자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탄을 해 보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다.
전에 어느 외국팀 원정대 대장이 베이스에서 지휘만 하고 있다가 캠프 전진은 안 되고 모든 상황이 너무 답답하여 울화통을 참지 못하고 단숨에 싸우스콜까지 올라갔는데 고소 증세로 다운이 되어 후송되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오늘 중으로 C3에 가스와 식량을 공급을 해 주던가 아니면 철수를 해야 한다. 이제 철수를 하면 사실상 이번 등반은 끝이다. C2의 셀파 중에 안 올라가겠다는 겔젠을 설득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C3로 출발시켰다.
계속 로체 쪽을 바라보며 바람이 제발 잠잠해 지기를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했던지 오후부터 다시 하늘이 흐려지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어제 온 눈으로 아이스폴 상황이 아무래도 불안하여 파손된 부분이 있으면 보수 하도록 아침에 셀파 2명을 출발 시켰는데 그 친구들이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참으로 좌불안석이다. 걱정을 하는 가운데 날이 완전히 저문뒤 7시가 다되어 셀파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얘기로는 어제 온 눈으로 깔아놓은 휙스로프는 거의 묻혀 버렸고 눈이 허리까지 빠져 4시가 다되어서야 겨우 C1에 도착을 했다는 것이다. C1지역도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 우리의 텐트는 완전히 묻혀버려 지붕만 겨우 보인다고 한다. 이제는 바람만이 아니고 눈과도 싸움을 해야 할 판이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더니 바로 우리가 그 모양이다.
2월 12일 (수)
어제 저녁부터 내리던 눈은 아침이 되니 그쳤고 날씨도 아주 쾌청이다. 베이스 지역은 바람도 없고 조용한데 C2이상의 지역은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고 정상 쪽에서는 팬텀기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김종호, 박성우 대원은 벌써 4일째 C3에서 버티고 있다. 고도 7,400미터는 앉아있다고 휴식이 되는 곳이 아니다. 밤에 수면을 할 때는 산소를 사용해야하고 하루하루 체력은 눈에 띠게 떨어진다.
김종호 부대장은 진통제를 먹으며 버티고 있다. 이렇게 버티고 있다가 막상 날씨가 좋아져 공격의 기회가 온다고 한들 과연 정상까지 갔다 올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을 것인가?
억지로 출발을 했다가 만약의 사태가 발생을 한다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무리 정상 등정도 중요하지만 조금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
베이스에 있던 김영대, 박동석 대원을 지원 차 C2로 올라 가도록 하고 셀파 3명은 같이 올라가 철수할 짐을 가지고 내려오도록 했다.
그사이 C2에 혼자 있던 홍성암 대원은 베이스로 하산도록 했다. 짐 수송차 올라간 셀파들이 C1과 C2의 설원지대에서 러셀이 안 된 신설 때문에 무진 고생을 하다가 8시가 넘어서야 귀환하는 바람에 사고가 난줄 알고 비상이 걸렸다.
저녁 늦도록 내일 싸우스콜 진출 계획을 짜느라고 고심을 하였다.
내일 아침 C2에서는 사다와 니마옹추, 겔젠등 세 명의 셀파가 출발을 하여 C3에서 김종호 부대장과 합류를 한 뒤 싸우스콜로 진출하기로 최종결정을 보았다.
2월 13일 (목)
이제는 도저히 뒤로 물러갈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아침 6시부터 C2, C3 와 숨가쁜 교신이 시작되었다. 가장 걱정하였던 날씨도 위에서 역시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큰 기대를 걸고 출발을 확인하는 중 C2의 김영대 대원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여기는 C2 베이스 나와라”
“여기는 베이스 말하라”
“지금 셀파들이 올라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제 얘기가 다된 거 아니야?”
열이 확 올랐다.
“사다 얘기로는 바람도 불고 날씨가 좋지 않아 올라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
“그래? 지금 이곳 날씨는 괜찮은데 그곳은 어떤가?”
“예 이곳도 운행에는 별 지장이 없겠습니다 ”
그놈의 사다가 끝내 말썽이다. 당장 쫓아 올라가 요절을 내고 싶은 것을 참고 C3의 김 부대장과 삼각 교신을 하면서 셀파들을 달랬다.
지금 C3의 날씨도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니 일단 C3까지 가서 다음 운행 상황을 결정하기로 간신히 타협을 한 뒤 7시에 이들을 출발 시켰다.
C3의 김 부대장과는 계속 교신을 하며 셀파들이 도착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셀파들이 아침 10시까지 C3에 도착을 해야 오늘 중으로 C4까지 올라 갈수가 있다. C3에서 C4까지는 6-8시간이 소요되는데 만약 C4에 올라갔다가 날씨가 안 좋을 경우 다시 C3로 되돌아올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11시가 지나면 C3출발은 포기해야 한다.
C2를 출발해서 3시간이면 C3에 도착할 수 있는 셀파들이 11시가 넘어 12시가 다 되어서야 C3에 도착을 했다. 약이 올라 흥분해 있던 김종호 부대장이 늦게 온 뒤에도 너무나 태연한 셀파들을 보고 화가 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왜 늦었느냐고 물어보니 사다의 대답이 걸작이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이 11시가 아닙니까?”
하면서 뒤로 한 시간 돌려 논 자기의 시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 좋다 그럼 지금 올라가자”라고 하니 사다가 말하기를
“ 안됩니다. 오는 도중에 슬리핑백을 놓고 와서 올라가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아니 미친놈이 아닌 담에야 길에다가 왜 슬리핑백을 놓고 온다는 얘긴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사다가 너무나 화를 나게 한다.
김종호 부대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 받고나니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돌 것 같다. 무전기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내 기세가 너무 험악했던지 진행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하고 내 주위를 기웃거리던 새컨 사다인 까미체링과 셀파들이 슬그머니 피해 버린다.
“세상에 이런 죽일 놈이 있나? 사다놈이 끝내 일을 망치는 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상황 끝이다.
사다가 내 앞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김 부대장에게 당장 사다를 베이스까지 하산토록 지시했다.
화가 너무 나서 나는 어떻게 할바를 모르겠다.
사다가 내려오면 책임을 물어서 장비를 모두 몰수하고 해고시키기로 작심을 했다.
그렇지만 참을 인(忍)자 세 번을 쓰면 살인도 피한다고 했던가?
펄펄뛰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정이 된다. 침착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사다나 다른 셀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반을 거부한 사실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도 지금까지 나름대로 애를 쓴 것은 사실인데 돈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담보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의 무모한 욕심을 위하여 그들이 사지를 향해 올라갈 마음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실 지금 우리가 하는 있는 등반 행위는 합리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오기 내지 어떤 의무감으로 무리하게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들의 말대로 우리는 참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팀이라는 지적이 어쩌면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내 던져가며 정상을 오르려고 하는가?
기회는 다시 만들면 되는데 너무 무리하게 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등반은 끝났는데 사다를 질책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전가시킴으로 해서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그와는 원수가 되고 한국등반대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만 나빠질 것은 뻔 한 일이 아닌가?
잊어버리자. 깨끗이 포기하자.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 오히려 아름답다고 했는데......
저녁때 베이스에 도착한 사다는 나한테 인사도 못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않는다.
2월 14일 (금)
지난밤에는 화가 갈아 앉지 않아 잠이 들었다가도 눈이 번쩍 떠져 밤을 거의 새웠다.
“이놈의 사다를 불러다가……. "
“아니야 어차피 끝난 일인데 ”
몇 번이고 마음이 변한다. 참으로 참기 어려운 힘든 하룻밤이었다.
아침부터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다. 점차 거세지기 시작하는 눈보라가 어제 무리를 해서 싸우스콜에 올라갔더라면 큰 고생을 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C3와 C2에서는 철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눈보라가 작업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고 어차피 등반이 끝난 상황에 위에서 머무를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무리해서 철수 중에 사고라도 난다면 더욱 말이 안 된다. 철수 작업에 신중을 기하도록 당부를 하였다.
3시 조금 넘어 눈을 맞으며 하산했던 김상겸 단장님과 정성근 기자가 올라 왔다. 한 달 조금 넘어 만나는 셈이라 무척이나 반갑다.
단장님을 보는 순간 등정실패에 대한 자책감이 심하게 느껴진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아니야 됐어. 최선을 다했으면 됐지. 괜찮아“
새삼 정상 쪽을 바라보노라니 눈물이 핑 돈다.
철수 일정을 위한 세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전진 캠프를 완전히 철수한 뒤 베이스에서 남체까지는 야크로 짐을 운반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남체에서 루크라 까지는 길이 무너져 야크가 다닐 수 없기 때문에 포타를 써야만 한다. 그런데 요즈음이 관광 시즌이 아니기 때문에 포타를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토요일 남체 장날에 포타를 모집해야 하고 그날을 놓치면 일주일을 또 넘겨야 한다.
21일을 남체에서 루크라로 하산하는 날짜로 정해 놓고 일정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일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셀파 한명을 하산시켜서 날짜에 맞추어 야크를 수배해 올려 보내도록 하고 내려가면서 아래 동네의 롯지 주인들에게 우리에게 남은 식량과 장비들을 팔 것이 많다고 소문을 내도록 하였다.
2월 15일 (토)
2월 15일은 동계시즌 등반 허가상 공식적으로 마지막 날이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전진 캠프가 완전히 철수 하는 날이기도 하다.
셀파 7명을 전부 C1, C2로 올려 보내서 하산 작업을 돕도록 했다. 하산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강풍이 정신없이 몰아쳐 철수 작업을 하는데 몹시 고생을 하였다.
8,500M지점에 데포 시켜 놓은 산소 2통과 휙스로프, 그리고 C3와 C4 사이에 놓고 온 짐들은 모두 포기 한 채 텐트만 걷어가지고 쫓기듯이 하산을 서둘렀지만 해가 완전히 넘어가서 칠흑같이 어두운 저녁 7시 반이 넘어서야 모든 작업이 끝났다. 지난 가을 인도 육군팀이 철수하면서 텐트와 장비, 식량등을 놓고 내려간 상황을 이해 할수 있겠다.
이제 남은 일은 아이스폴 지역에 설치한 사다리의 회수 문제인데 2-3일 무리하지 말고 회수가 용이한 것들만 걷어서 내려오도록 하였다.
오래간 만에 전 대원이 식당텐트에 모여서 식사를 하였다. 불기가 없는 썰렁한 식당 텐트안의 한기는 말없이 앉아 있는 대원들의 가슴을 더욱 춥게 만든다.
김상겸 단장님의 이번 원정을 마감하는 담담한 말씀이 모두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여러분은 이번 등반에 더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후회 없는 등반이었고 더구나 한사람의 사고나 희생자 없이 등반을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고마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들 말이 없는 가운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철수 작업이 거의 마무리 된 뒤 19일 본대의 마지막 하산에 앞서 단장님과 나 그리고 홍성암대원 정성근 기자가 2월 17일 베이스를 먼저 출발하여 하산을 하기로 했다.
개인 짐을 챙긴 뒤 베이스를 출발하기에 앞서 그동안 싫도록 보아온 베이스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온통 돌로 뒤덮인 베이스 지역과 종이를 심하게 구겨 놓은 듯한 아이스폴 지역, 그 위로 보이는 로체훼이스와 왼쪽에 버티고 서있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건너편에 햇빛이 비칠 때면 황금색 띠가 찬란한 창체 능선하며 밤이면 엄청나게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꽉 차 보이던 베이스에서 보던 밤하늘도 이제는 그만이다. 그리고 서능팀이 그렇게 고생을 하다 철수한 로라 능선과 왼쪽에 우뚝 솟아 있는 프모리봉과도 이제는 이별이다.
언제 이곳을 다시 와 볼 수 있을 것인가? 말없는 눈인사를 한 뒤에 마침내 하산의 발걸음을 옮겼다.
아! 과연 얼마만의 하산이냐? 작년 11월 28일 베이스에 도착을 한 뒤 한해가 바뀌었고 달수로도 3개월이 지난 오늘의 하산 길은 정말로 감회가 새롭다.
그동안 나는 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아주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먼 길을 걸으려하니 너무 힘이 든다. 특히 하산길이라 발끝이 신발에 닿으면 너무 고통스럽다.
단장님이 엄살이라고 놀려대는 바람에 약이 오르지만 빨리 걸을 수는 없고 한심하기만 하다. 정상 등정은 하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다.
이렇게 하고 어떻게 루크라 까지 내려갈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걱정이 된다.
스토크에 의지하여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하산 길은 상당히 빠르다.
로브제에 도착을 해서 오래간만에 사람이 사는 집을 보니 너무나 푸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나하고 한심해 했던 곳인데…….
고도가 4천대로 낮아지며 기온은 급속히 올라가고 산소가 풍부해지면서 몸 컨디션이 아주 좋아 진다.
내려오면서 인가도 많아지고 기온이 올라가며 길가의 눈들도 녹아서 질퍽한 것이 점점 속세로 돌아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기온이 올라가니 모든 것이 여유롭다. 몸도 마음도 모두 다 넉넉해진다.
마을을 지나며 집 마당에서 모이를 찾는 닭들을 보니 갑자기 식욕이 동한다. 오래간 만에 싱싱한 닭고기를 먹고 싶어 의견을 물으니 싫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특히 단장님은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신다.
주인을 불러 가격을 흥정한 뒤에 닭을 잡아 요리를 하도록 했다. 주인은 손님도 없는 철인데 오래간만에 장사를 하게 되니 신이 났다. 느긋하게 기다리던 중 뜻밖의 일이 벌어 졌다.
요리사가 닭을 잡기 위하여 목을 잡고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몸부림치던 닭이 탈출을 한 것이다. 사력을 다해 도망가는 닭보다 닭을 잡던 사람이 더 놀랬다.
만약 저 닭을 놓치면 한 달 봉급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주방장은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며 닭 잡아 달라고 아우성이다. 닭 한 마리 잡느라고 온 동네가 요란했다.
다행히도(?) 다시 잡힌 닭은 즉시 처형되고 말았다.
이런 소동을 겪으며 우리가 이제는 정말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왔구나 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팡보체와 남체를 거쳐 20일 루크라까지 내려오니 이제는 비행기타는 일이 걱정이다. 어제도 날씨관계로 비행기가 뜨지를 못했다고 하는데 내일은 과연 어떨는지 걱정이 된다.
텐트 안에서 꼼짝 못하고 몇 달이고 있을 때와는 달리 하루가 조바심 난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걱정대로 다음날 역시 비행기는 뜨지 못하고 하루 더 지난 21일 마침내 루크라를 출발하는 경비행기를 탈 수가 있었다.
본대의 철수는 짐이 많은데 고생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털털거리며 흙먼지 활주로를 달려 내려가는 비행기 안에서 두 눈을 감은 채 마지막으로 에베레스트를 생각해 본다.
“이제 나는 에베레스트를 죽는 날 까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죽는 날 까지 에베레스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너는 영원히 내마음속에 있는 것을 ”
활주로 끝 낭떠러지에서 휙 하며 하늘로 솟아 오른 비행기는 루크라를 뒤로 한 채 40분 만에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을 하였다.
철수 카라반 ( 베이스에서 루크라 그리고 카트만두 까지)
아래 내용은 철수과정을 기록한 박동석 대원의 일기이다.
2월 19일 (수) (B. C - LOBUJE)
아침 일찍부터 BACE CAMP 주위가 시장 바닥처럼 북적대고 있다. 대원들과 셀파들, 그리고 짐을 운반하려고 올라온 야크들과 몰이꾼들, 또 물건을 사려고 올라온 동네 사람들하며 모두 자기 일들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짐 포장과 나머지 장비 식량 등의 처리는 어제 거의 끝냈기 때문에 오늘은 대원용 식당텐트와 취사용 텐트, 그리고 거주용 텐트 등을 모두 걷어버리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셀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못쓰는 것들은 쓰레기 처리만 하면 된다.
그토록 지겹게 불어대던 바람이 철수를 하는 오늘까지도 눈발까지 날리며 세차게 불어대고 있다. 푸모리 쪽은 치가 떨릴 정도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 쿰부지역을 모조리 쓸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단장님과 대장님, 성암형은 이미 루크라로 떠나셨다. 우리도 출발 준비가 끝나는 대로 대원, 셀파, 야크등 로부제를 향해 하나 둘 출발을 시작하고 이제 베이스지역엔 마침내 타다 남은 쓰레기만 남아있다.
그렇게도 밉게만 보이던 에베레스트를 마지막 하산 길에 다시 보려니 눈물이 날 것 같다. 세찬 바람 속에 철수행렬은 로부제를 향해 줄을 이었다.
로부제에서의 하산 첫날밤, 아쉬운 마음을 걸쭉한 “창”과 구수한 감자로 달래어 보지만 눕체위에 휘영청 차갑게 떠있는 둥근 달은 또다시 정상을 향한 미련을 불러일으킨다.
2월 20일 (목) (LOBUJE - THANGBOCHE)
아침을 먹으라는 영대형의 목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깼다. 로부제에서 묵은 야크 몰이꾼들은 벌써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볶음밥과 계란후라이로 아침을 마치고 출발한 뒤 투클라에 도착해 보니 벌써부터 술에 취한 셀파들이 서성대고 있다.
오랜 동안의 고용생활에서 풀려나니 무척이나 기쁜 듯 해방감에 푹 젖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다시 터덜터덜 걸어서 앙카르마의 롯지에 도착해서 점심을 마치고 떠나려 하니 사고 없이 등반을 마쳤다고 하얀 모시 망사 천을 대원들의 목에 걸어준다.
그동안 장사를 떠나 인간적으로 친했던 그 였기에 더욱 고맙고 섭섭하다.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기온이 점차 올라간다.
페리체 이하의 마을에는 벌써 봄이 와 있었다.
쌓였던 눈이 녹아 길은 질퍽하고 별로 힘들지 않은 내리막길을 걷는데도 등에 땀이 난다.얼마 가지 않아 팡보체의 양정팀 사다였던 학파겔젠 집에 도착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듯 진수성찬으로 대원들을 대접한다. 꼬마들에게 남겨 놓았던 초콜릿 한 박스를 주고 남은 산소통 2개를 맡겨 놓은 다음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해 탕보체에 도착을 하였다.
남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싼값에 사려고 장사꾼들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판 물건이지만 다음에 우리가 다시 사려면 제값을 다 주고 사야 한다.
2월 21일 (금) (THANGBOCHE - NAMCHE BAJAR)
아침 일찍 일어나 탕보체 사원앞 넓은 마당에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에베레스트 전경이 뚜렷하게 보인다. 흰 구름을 날리며 의연히 서있는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저려온다.
발길을 돌려 딸랑대는 야크 방울 소리를 들어가며 묵묵히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풍키 마을을 지나 산 구비를 꼬불꼬불 끝도 없이 돌다보니 마침내 남체에 도착을 했다. 쿰중에 사는 셀파들과 헤어지고 나니 식구가 단출해졌다.
이곳에 내려오니 집에 다 온 것 같아 조금씩 마음이 흥분되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떨어져 살다가 큰 마을에 도착을 하니 고향 같은 기분이다. 더구나 오래간 만에 전기 불까지 보니 이제는 완전히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 듯하다.
물건을 살려는 사람들이 또 몰려든다.
내일은 루크라에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짐은 이곳에서 다 처분해야 한다.
철수 카라반이건만 한가한 시간은 가질 수가 없다.
2월 22일 (토) (NAMCHE BAZAR - LUKLA)
매주 토요일 이곳 남체에서는 쿰부 지역의 유일한 장이 선다. 멀리 티베트에서까지 이곳 장을 보기 위해서 온다고 한다.
커다란 구경거리인 장서는 모습을 구경하며 우리 짐을 지고 내려갈 짐꾼을 모았다.
모인 짐꾼들에게 짐을 분배하느라고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다.
이윽고 남체를 출발했다. 하산하는 길에 새로 난 길과 구 길이 갈라지는 곳에 전 대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에 기념 촬영을 한 뒤 급한 경사길 을 따라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 되었다.
이곳에는 니마옹추 집이 있어 모든 대원과 남아있던 셀파들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산에서는 속을 썩이던 그들도 하산하고 나니 착한 네팔인 들이다.
정들었던 니마옹추와 작별을 한 뒤 루크라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숙박지인 히말리안 롯지에 도착을 하니 먼저 와 있던 영대 형이 도착하는 포타들의 짐 체크에 바쁘다.
남체에서 이곳 루크라까지는 하루에 내려오지만 임금은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틀 치를 계산해 주어야 한다.
저녁 식사 후 남은 대원들과 셀파들은 조촐한 파티를 마련하였다.
안까미와 다와타망의 춤 솜씨는 일품이었고 메일런너 사일라는 자리에 모인 이들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헤어짐이란 이리도 섭섭한 것일까? 눈물이 날 지경이던 베이스캠프와의 이별만큼이나 구름이 잔뜩 하늘을 가려버린 이 밤이 꽤나 슬프게 느껴진다.
2월 23일 (일)
오늘 카트만두 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이곳에서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기상상태가 불안한 이 지역은 비행기가 못 뜰 때가 많고 여행객들이 몰리다 보면 우리는 비행기 잡기가 어려워진다. 운 좋게 비행기에 탈 수가 있었다.
1차로 경순 형을 제외한 4명의 대원과 짐을 실은 비행기가 터덜거리는 풀밭 활주로를 위태롭게 이륙해서 카트만두를 향했다.
다음 비행기로 온 경순 형은 큰 고생을 하였다.
비행기에 실을 짐들을 거칠게 다루다가 원래 비행기에 싣지 못하게 된 산소통을 몰래 가지고 오려던 것이 산소통의 밸브가 열려서 새는 바람에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놀랜 비행장 직원과 경찰들이 짐을 온통 다 뒤지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었고 산소통은 밸브를 열어서 다 비워야만 했다. E. P. I 가스통마저 못 싣게 해서 한 박스 이상 되는 것을 모두 카르마에게 주어버렸다.
참으로 어렵게 11시 조금 지나 루크라를 이륙한 비행기는 12시에 카트만두 비행장에 간신히 도착을 하였다.
공항에 미리 나와 계시던 대장님과 김경배 선배님 그리고 기자 형들이 깨끗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 주신다.
점심은 김경배 선배님이 경영하시는 아리랑 식당에서 먹었는데 오래간만에 진짜 한국음식을 먹었더니 먹어도 먹어도 한없이 들어간다.
카크만두 시는 작년가을 추수가 다 끝난 뒤 우리가 떠났는데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고 봄철이 되었다.
며칠 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영하의 날씨 속에 있다가 잡자기 꽃피고 더위마저 느끼는 곳으로 오니 모든 것이 다 넉넉하고 여유가 충분한 듯 마음마저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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