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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6동계에베레스트등반기

1984년 에베레스트 트레킹 (상) 서울 출발~남체바잘(3,440m)

by 남상태 2023. 5. 23.
등산용어사전에서 트레킹이란 뜻을 찾아보면
“원래는 소달구지로 멀고도 험난한 길을 여행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산록일대의 등산로를 따라 이산 저산으로 여행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로 히말라야 산록을 오르내리는 여행을 트레킹이라고 한다”
라고 적혀있다.
지금은 히말라야 트레킹도 상당히 발전하여 포터, 쿡, 가이드를 대동하고 텐트, 침낭, 취사장비등 무거운 짐은 전부 포터에게 맡긴 채 작은 색이나 지고 편안하게 산행을 하고 있어 옛날의 트레킹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1984년 우리나라에 트레킹에 대한 개념이 일반화되기 전 에베레스트 동계등반을 대비한 정찰을 위해 지리에서부터 루크라를 거쳐 에베레스트 베이스 지역까지 산악부 동기인 강수와 둘이서 20일간 트레킹 했던 기록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 코스를 트레킹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뒤늦게 정리하다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다

1984년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홍콩을 거쳐 카트만두에 도착하니 듣던 대로 카트만두 는 우리나라 60년대 초 수준이다.
왕궁이 지척인데도 정리가 안 된 도로와 길거리를 활보하는 소들, 그리고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방치된 시내를 보면서 이곳이 과연 일국의 수도인가 의아할 정도인데 그런 속에서 며칠 지나다 보니 또 그런대로 적응이 된다. 그리고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에서처럼 우리가 기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진다.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정한 뒤 이곳저곳 구경을 하면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카트만두가 마치 오래전부터 지내온 곳인 양 벌써 익숙해진다.
트레킹 허가를 받고, 산행에 필요한 식량 등을 준비한 뒤 버스터미널에 가서 우리가 타고 가야할 버스표 까지 예약을 하고나니 이제는 출발할 일만 남았다.

이번 트레킹 코스는 히말라야 산행 경험과 이곳의 분위기를 조금 더 체험하기 위해 “지리”로 들어가는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그 바람에 루크라에서 시작하는 산행보다 약 1주일정도 일정이 더 길어져 식량 등 필요한 짐들도 많이 늘었다.
 
“루크라”까지는 비행기로 40분이면 갈 수 있는데 “지리”부터 걸어서 가면 일주일이나 걸려 문명의 이기에 대한 경외심이 실감나는 곳이기도 하다.
"카트만두”에서“지리”까지는 버스로 하룻길이다.
분지 형태인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나 산길을 반나절 올라가고 반나절은 내려가야 하는 비포장도로는 세계의 오지답게 험난하기 짝이 없다.

이른 아침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여러 대의 버스가 보이는데 어느 것이 우리가 타야 할 버스인지 분간이 안 간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가운데 그럴싸한 버스 앞에 가서 한 남자에게 물었다.
"지리 오케이?"
“오케이”
단순한 확인 끝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큰 짐은 버스 지붕위에다 올려놓고 작은 짐은 들고서 버스에 올라 탄 뒤에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출발 전에 아무래도 미심적어 옆 사람에게 행선지를 다시 물어보았다.
 
“디스 버스, 지리, 오케이?”
 
그 사람이 “ 노” 하며 손을 흔든다.
 
처음 물어본 사람이 책임 없이 대답한 “오케이” 라는 말을 믿고 우리는 엉뚱한 곳으로 갈 뻔했다.
허겁지겁 출발하려는 차를 세우고 버스지붕 위에 올라가 짐을 내린 뒤에 다시 우리가 타고 갈 버스에 옮겨 싣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그러고 난 뒤 막상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버스 안은 이미 만원이 되어 있었다.
꾀죄죄한 낡은 버스 안에는 네팔사람들로 가득 한데 막상 우리가 앉을 자리는 없다. 하루 종일 서서 갈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다.




외국 사람이 서 있으니 그들도 안 돼 보였는지 둘이 앉았던 자리를 좁히면서 의자 끝에 앉으라고 권한다.
호의가 고맙기는 하지만 간신히 걸친 엉덩이는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떨어질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어 다리에 힘을 주다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고생은 중간에 손님이 내릴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른 새벽부터 서두른 보람도 없이 고생을 하는 게 억울하기만 하다. 그러나 누구 탓을 할 것인가?
차안에 탄 외국인은 스페인 부부와 우리 두 사람, 모두 네 사람이고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실어 나르는 듯 한 비좁은 버스 안은 아무리 둘러봐도 그리 상쾌한 분위기는 아니다.
 

아침 일찍 출발한 관계로 버스는 승객들의 아침 식사를 위하여 조그만 마을에 정차를 하였다. 그런데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이라고 하는 곳은 채광이 잘 안되어 어두컴컴한데다 지저분한 식탁하며 불결한 식당 분위기가 영 식사를 할 기분이 아니다.
더구나 수저는 사용하지 않고 군대 식반 같은 용기에 담은 밥을 수저도 없이 카레 같은 국물에다 시커먼 맨손으로 밥을 주물럭주물럭 하여 입에다 넣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아무래도 식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아 강수와 나는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스페인 부부도 식사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나와서 앉아 있다.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서 허기진 배를 수통의 물로 채우려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너무 배가 고파 동내 가게를 찾아보았으나 조그만 움막 같은 집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과자 몇 개와 음료수뿐인데 냉장고가 없어 음료수는 더운 김이 날 정도다.
주저하다가 콜라를 사서 목이나 축이려 했지만 뜨거운 콜라는 아무래도 못 마시겠다. 그래서 그 콜라는 결국 옆에서 구경하던 동네아이들 차지가 되고 말았는데 평상시에는 꿈도 못 꾸던 콜라인지라 아이들 간에는 맹렬한 쟁탈전이 벌어진다.
우리가 먹지 못하는 콜라를 이 아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굿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호사스러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포장도 안 된 험한 산길을 덜컹거리며 출발한지 12시간이나 지나서야 마침내 어둑해진 하늘 아래의 첫 동네인 “지리”에 도착하였다.
버스가 도착하자 롯지에서 몰려나온 호객꾼들은 손님을 먼저 차지하려고 아우성들이다.
 
그중에 가장 열심히 소리치는 친구 손에 이끌려 들어간 롯지는 마치 6.25때의 판잣집 같은데 방문도 엉성하고 시설도 형편없어 과연 오늘밤 이곳에서 자도 되는지 심히 걱정이 된다.
방문에 잠금 고리가 없어 잠그지도 못했는데 오밤중에 어떤 친구가 거침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후랫쉬를 번쩍 거린다. 혹시 강도가 아닌가하고 몹시 놀랬다. 다행히도 방을 잘 못 찾은 사람이라 별일은 없었지만 그 뒤에는 불안해서 잠이 잘 안 온다.
 


카라반의 시작

4월 14일. “지리”의 아침은 닭울음소리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시작이 되었다.
지리를 출발해서 반다르, 세테, 준베시, 눈탈레, 카리콜라, 푸이얀, 팍딩을 거쳐 남체까지 약 1주일의 험난한 트레킹 일정은 생각만 해도 걱정이 된다.
그래도 1,860m 에서 3,600m사이의 산을 오르내리는 산길을 걷다 보면 고도순응은 물론 네팔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우리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루크라” 비행장이 생기기 전에는 원정팀은 모두 이 코스를 이용해서 걸어갔으며 우리나라의 77에베레스트 팀도 이 코스로 올라갔다
 
아침 일찍 롯지 밖에 나오니 트레커 들의 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포터 들이 진을 치고 대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 중에 인상이 좋은 포터 셋을 고용해서 짐 운반비를 흥정을 하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하니 흥정이 되는지 안 되는지 분간이 안 된다.
“원데이, 서티 루피, 오케이?”
그들은 우리와 달리 긍정 한다는 표현을 고개를 앞으로 끄떡이는 것이 아니고 옆으로 끄떡여서 우리가 보기에는 싫다고 하는 뜻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 너 싫어? 그러면 그만두고”
그런데 그들은 우리의 짐을 메고 갈 태세다.
“이 친구들이 사람 놀리나?”
사람의 표현방법은 서로간의 약속이다. 오케이 표시를 고개를 앞으로 끄떡이든, 옆으로 하든, 아니면 뒤로 하든 서로 약속만 하면 되는 것이지 꼭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제 부터는 우리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이곳 사람들의 습관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아무래도 우리의 신상에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짐을 분배한 뒤에 출발을 서두르고 있는데 같은 롯지에 묵었던 스페인부부의 키 큰 남편이 롯지의 여주인과 동네가 떠나가라고 요란하게 싸우고 있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의 숙박 요금보다 여주인이 요구하는 금액이 비싸 롯지 주인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 숙박 요금이 정부의 고시 가격도 아니고 주인 마음인데 자기네 나라에서 만든 책을 근거로 숙박요금이 비싸다고 요금을 따지는 스페인 친구가 참으로 순진해 보인다.
“이친구야, 당신 앞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작정인가?”
하긴 우리 입장에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스페인 남편은 가이드북을 흔들며 떠들어대고 롯지 여주인은 돈이나 빨리 내놓으라고 아우성인데 상대편의 말은 듣지도 않고 각자 자기나라말로 떠들며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이 스페인 부부와는 “페리체”전 까지 10일 이상 트레킹을 같이 하면서 이런 저런 일로 에피소드가 많았다. 키가 껑충한 남편에 비해 부인은 아담한 체격인데 정작 지고 가는 배낭은 부인의 것이 더 크고 걸을 때도 항상 부인이 앞장서서 걷는다.
 
트레킹 기간 중 숙박은 대부분 롯지를 이용하고 식사는 가능하면 직접 해서 먹는다. 장기간 걸어야하고 고소가 오기 시작하기 때문에 식량 준비는 고소에 맞는 것으로 신경을 써서 준비해두는 것이 좋으며 무거운 짐은 가능하면 포터를 이용하고 자신은 가볍게 지는 것이 좋다.
첩첩산중에 간간히 나타나는 산골 마을에는 찻집이 많은데 양젖을 섞어 만든 차는 처음에는 비 위생적인 것 처럼 보이더니  나중에는 그런 대로 먹을 만하다.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차를 많이 마신다. 앉아서 쉴 때는 어김없이 차를 마신다. 고소 적응에도 좋다고 하니 우리도 열심히 마셨다.
첫날 “반다르”까지는 몸이 안 풀려 그런지 몹시 힘이 든다. 앞으로 장장 20일 이상 산길을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짐을 너무 많이 진 것 같다.
목에 멘 니콘 카메라가 점점 무거워져 목이 휠 것만 같다. 포터를 한사람 더 고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몇 푼 아끼려다 큰 고생을 하는 것 같다.
 

아직 고도가 3천대 밖에 안 되는데도 걸음걸이가 아주 무겁다. 나는 고소에 유난히 약한 체질이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는데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고소에 적응이 안 되면 대책이 안 선다. 어느새 얼굴은 부어서 찐빵 같고 눈은 감기어 시야가 가려질 정도다.
주위의 산세는 급경사가 많고 길이 좁아 급사면을 가로 질러 이어진 좁은 산길을 가다가 자칫 실족을 하면 5, 6백 미터는 논스톱으로 굴러 떨어지게 생겼다. 넘어져도 절대 계곡 쪽으로 넘어지면 안 된다.
힘이 들다보니 주위의 경치는 눈에 안 들어오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은 참으로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의 포터들은 무거운 짐을 진채 잘도 걸어가는데 헤어졌다가도 우리가 숙박하는 곳을 용케 알고 잘도 찾아온다.




“세테”를 지나 “남체”까지의 코스 중에 가장 높은 3,530m짜리 고개인 람주라 패스에 도착을 하니 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반바지를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고소증세인 듯 두통이 심하고 온몸이 아파오는데 다리를 한발 옮기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어제까지는 날씨가 너무 더워 혀를 빼물고 걸었는데 하루 만에 추위에 떨고 있으니 고도에 따른 온도 차이를 실감할 수가 있다.
 
롯지의 잠자리는 군대막사처럼 가운데에 통로가 있고 양쪽에 침상이 있는데 트레커들은 도착하는 순서대로 좋은 자리를 골라 배낭을 놓은 뒤 슬리핑백을 깔아 놓는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입구 쪽이나 좋지 않은 장소의 차례가 오기 마련이다.




 
간간히 만나는 트레커들은 동양 사람은 보기가 힘들고 거의가 서양 사람들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남녀가 짝을 지어 가는 경우도 있고 남자끼리 가는 경우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지는 않는다.
 
남녀 혼성팀은 처음에는 부부나 연인 사이인줄 알았는데 카트만두에서 출발할 때 처음 만난사이인 경우가 많아 깜짝 놀랐다.
트레킹도중 만난 남녀 사이가 아무래도 궁금하여 남자가 없는 사이에 여자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유어 허스밴드?”
여자는 강하게 부정을 한다.
“오! 노우”
우리 같으면 설사 아니더라도 남 보기가 겸연쩍어 우선은 “오케이” 할 텐데 너무도 당당하게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부정을 하는 것은 우리 정서상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된다.
“ 맞아 여기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자고 했었지!”
 

롯지는 환경이 불결하여 빈대나 이, 벼룩 등이 극성이다. 잘 때면 온몸이 가려워 잠을 설치기가 일수다.
한국에서 가지고간 살충제로 슬리핑백과 잠자리 주변을 뿌리니 잠자리가 훨씬 편안하다.
“준베시”에서 같은 롯지에 묵은 스페인부부에게 살충제를 빌려주었더니 너무 고마워한다. 그들도 물 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런데 롯지 주인이 그 살충제를 보더니 스페인 친구에게 받아서 온 집안을 뿌리고 다녀서 얼른 빼아았다.
“아니, 딱해서 빌려주었더니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가 인심을 써?”
다음에는 스페인 친구에게도 선심 쓰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우리가 고용한 3명의 포터는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친해져 말은 안 통하지만 손짓 발짓으로 간단한 의사는 통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롯지에 도착을 한 뒤에 짐을 풀어 놓으면 옆에 와서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듯 이것저것 살펴보는데 시골 아이들 같이 순진해 보이는 이들에게 연민의 정이 간다.
이들은 30kg의 짐을 지고 맨발로 험한 산길을 하루 종일 걷는다. 그래서 받는 임금은 우리l나라 돈으로 겨우 3천 원 정도, 이들의 발바닥은 굳은살이 박혀  우리들 등산화 창만큼이나 두껍고 단벌옷을 입은 채 밤에 잘 때는 처마 밑이나 움막에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마대자루 같은 것을 몸에 감고 웅크리고 자야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것이 이곳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에 가슴이 아파 오는데 눈이 마주치면 웃는 모습이 그렇게 순박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처럼 만에 갖게 된 일자리가 너무나 다행스럽다는 듯 행복한 얼굴이다. 행복의 기준은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




준베시(JUNBESI)를 지나고 카리콜라(KHARIKHOLA)를 거쳐 남체바자르를 향해 가는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간간히 만나는 마니 월(MANI WALL)은 티베트 경문을 돌에다 조각을 해서 길에다 세워 놓은 것으로 이곳 사람들은 이 마니 월을 지날 때는 예를 표한다.
카리콜라에서 숙박을 한 뒤 아침에 일어나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몸도 아프고 날씨도 안 좋은데 이곳에서 하루 쉬어 가기로 했다.
지형이 협소한 관계로 산의 경사면을 깎아서 만든 집 앞 방문 앞은 바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좁은 길이고 그길 바로 밑은 계곡으로 연결된 급사면이다.
방문을 열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다. 몸살기가 오는 것 같아 약을 먹었는데 내일 길 떠나는데 지장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다음날 아침은 다행히 날씨도 개이고 몸도 회복이 되었다.
 

심하게 오르내리는 고갯길이 이제는 너무나 두렵다.
3071m의 트랙신도라(TRAKSINDO LA)를 넘어 다시 한참을 내려온 뒤 마을에 도착하니 동네가 제법 크고 사원까지 있는데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사람을 만났다.
히말라야에 트레킹을 하다보면 오지 속 까지 와서 살고 있는 일본사람들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런 것을 국력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어떻든 우리로서는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다.
풀레리(1980m)를 지나 급경사를 내려가면 두드코시(DUDH KOSI) 강 위에 높다랗게 걸려있는 출렁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Milk Liver라는 뜻의 이 강물은 정말로 우유를 풀어 놓은 듯 한 회색빛의 탁류로 기세도 좋게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산길을 걷다보면 때로는 기분이 좋아 질 때가 있다. 경사가 완만한 산록을 오래간만에 흥얼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산 아래를 향해 누군가를 열심히 부르고 있다.
계속해서 부르고 있는 대상이 궁금해 그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유어 쏜?”
 
당신의 아들을 부르느냐는 내 질문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그러는지 고개를 옆으로 끄떡끄떡한다.
 
“메이아이 핼프 유?”
 
또 끄떡 끄떡
나는 손나팔을 만들어
 
“삼돌아! 빨리 올라와, 늦게 오면 밥 안 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이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갑자기 내 어깨를 치며 배꼽을 쥐고 웃는다.
덕분에 나도 오래간만에 유쾌한 기분이 되었는데 웃음은 역시 사람을 즐겁게 하는가 보다.
 

캬라반 일주일 만에 비행장이 있는 “루크라”에 도착을 하였다. 교통편이라고는 오직 걷는 방법 밖에 없는 오지의 산골마을에서 문명의 첨단 이기인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은 참으로 묘하다.
문명과는 거리가 먼 히말라야 오지 산길을 힘들게 걷기만 하다가 비행기를 지척에서 볼 수 있는 곳까지 왔다는 것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다.
 

루크라와의 갈림길과 만나는 차불릉을 지나고 강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가트(2550m)와 팍딩(2650m)이 나오고 팍딩을 지나면서 탐세루크(6623m)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제 서서히 고산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초모야를 지나는데 조금 큰 이층짜리 롯지와 그 앞에 꾸며 놓은 밭의 모양이 이곳 네팔 사람들의 것과는 어딘지 다른 모습이다.
조금은 세련되 보이고 정원 비슷한 분위기가 눈길을 끄는데 그 밭 가운데 서있는 사람과 말을 해보니 모양은 수염을 기르고 차림새가 지저분해서 이곳 사람과 구별이 안 가지만 자기는 일본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웃나라 사람이라는 반가움에 이곳에서 하루 묵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호감과는 달리 우리를 대하는 것이 불친절하기가 짝이 없고. 음식도 형편이 없어 시킨 볶음밥이 비위에 맞지 않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어쩐지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쩔 것인가 맺지 못할 짝사랑의 슬픈 인연인 것을…….
다음날 아침 출발 전에 시킨 “에그후라이” 조차도 입에 맞지를 않아 먹지를 못하고 결국 빈속으로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더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계산서를 보니 생각보다 요금이 비싸다.
조르살레를 지나면 두두코시와 보테코시의 지류가 갈라지는 곳에 다다르는데 이곳의 다리를 건너면서 남체로 오르는 급경사가 우리를 맞이한다.
 

남체로 올라가는 이 고개는 사람을 완전히 탈진하게 만든다. 급한 경사 때문에 길을 지그재그로 만들었는데 아침을 먹지 못한 탓에 너무 배가 고프고 힘이 들어 아예 길바닥에 눕고만 싶다.
2시간 가까이 오르는 길은 끝도 없어 보이는데 간혹 서양 트레킹 단이 줄을 지어 내려 온다. 노인들도 많이 보이는데 내려오는 길이라 그런지 서로 농담도 하며 가볍게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는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래도 명색이 원정팀의 멤버로 사전 답사를 온 사람들인데 이렇게 비실거려서야 에베레스트 등반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한심한 생각에 의기소침해 있는데 노랑나비가 한마리가 가볍게 내 주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나를 비웃고 있다.
 

출발한지 3시간이 넘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지막 언덕에 올라서니 고도 3440m의 남체바자르(NAMCHE BAZAR) 전경이 펼쳐진다.
부채처럼 펼쳐진 산기슭 아래 작은 분지 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 같은 동네의 모습이 오래간 만에 보는 큰 마을이라 자못 감격스러운데 급한 대로 마을 첫머리 롯지에 들어가서 먼저 배고픔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침을 못 먹은 탓에 올라오면서 더욱 고생을 한 것 같아 그놈의 롯지와 일본사람 주인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곳 “남체바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 산속 마을로 티베트에서 일주일씩 걸어서 이곳까지 장을 보러 온다고 한다.
자가 발전으로 저녁이면 몇시간 전기도 들어오고 라디오 소리도 들리는 것이 제법 문명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인데 모든 등반대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며 고도가 3천대에서 4천대로 넘어가는 길목인 이곳은 등반대들이 며칠씩 묵으면서 고도순응을 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숙소를 첫 번째 롯지로 정한 뒤 마을 가게에 가서 드라이드치킨 캔을 사 가지고 와서 찌개를 끓여 오래간만에 포식을 하였다.
식후에는 파인애플, 망고, 파인 넥타, 초코렛등 입맛대로 골라서 오래간만에 입을 즐겁게 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함포고복(含哺鼓腹) 이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우리는 이곳까지 동행한 포터들에게 임금계산을 한 뒤 보너스로 한국에서 가져간 라면을 몇 개씩 주니 좋아서 입이 딱 벌어진다.
라면 한두 개로 이렇게 생색을 낼 수 있는 경우도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