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에베레스트 원정기 (상)
지구의 세 번째 극점 에베레스트



지구에는 세 개의 극점이 있다고 한다. 지구의 제일 밑 부분인 남극점과 제일 윗부분인 북극점, 그리고 지구에서 제일 높은 지점인 에베레스트의 정상이 바로 세 극점이다.
우리 고대산악회는 지구의 3극점중의 하나인 에베레스트를 그것도 정규시즌이 아닌 동계에 오르고자 계획을 세웠다.
동계시즌 등반 계획은 우리의 등반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꼭 동계에 해야 하겠다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5대륙 최고봉을 우리 고대산악회 단독으로 직접 오르고자하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에베레스트의 등반 허가 관계가 봄, 가을 시즌은 다른 등반대가 등반 신청을 해 놓은 뒤라 남은 빈자리를 찾다보니 할 수 없이 그 어렵다는 동계시즌으로 결정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도 마찬가지이지만 같은 산이라도 봄, 가을 시즌에 오르는 것과 겨울에 오르는 것은 그 난이도가 천지 차이 이다.
에베레스트의 경우 원래 동계 시즌에는 등반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등반허가 자체를 해주지도 않았고 또 일반 등반 팀들 역시 오를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히말라야의 8,000m급이 모두 완등 되고 나자 등반 방식을 다양화 하여 같은 산이라도 바이레이션루트를 택하거나 어려운 시즌을 선택하여 도전하고자하는 추세로 바뀌다 보니 불가능하게 여겼던 동계시즌 등반에 대하여 여러 팀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원정가기 1년 전 양정산악회의 동계 등반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라 주위에서는 우리 고대 팀의 동계에베레스트 등반 계획을 대부분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구나 우리 팀의 멤버 구성을 보면 인정받는 유명 산악인은 없고 전부 순수한 대학산악부 멤버뿐이며 히말라야 고산 경험도 거의 전무한 상황이니 그렇게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시선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묵묵히 등반 준비에만 전념을 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해외원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금 조달이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를 않아 마지막 까지 진통을 겪었다.
그로 인하여 등반장비의 선적이 늦어지고 카트만두에서 원정대 짐을 한 달이나 늦게 찾는 바람에 등반 일정 역시 상당한 차질을 빗게 되었다.
하기야 등반대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갖추어져서 휘파람불며 출발을 하는 팀이 얼마나 될까 만은 자칫 했으면 아예 원정이 무산될 번했다. 해외 등반의 경우 출발을 하면 반 성공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어떻든 반 성공은 한 셈이다.
대원은 외부인은 한 사람도 없이 전부 고대 산악회 출신인 OB와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장에는 우리 고대산악회의 실질적인 최고 선배인 54학번의 김상겸 교수님, 대장의 중책을 맡은 63학번의 나, 그리고 부대장에 김종호(73), 얼마 전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홍성암(73),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장경순(78), 경상도 사나이 김영대(81), 3학년에 재학중인 83학번의 박동석과 박성우등 모두 8명의 대원으로 구성이 되었고 여기에 KBS의 정성근 기자와 김창훈, 백성민 두 카메라 기자가 포함되어 모두 11명의 식구들로 이번 원정대가 구성되었다.
아래의 내용은 1985년 10월 10일 부터 1986년 2월 20일 까지의 등반 기간중 실제로 산에서 등반이 시작된 12월 1일부터 1986년 2월 15일 까지 77일간의 등반 일기를 나중에 다시 들춰 보다가 감회가 새로워 뒤늦게 다시 정리 해 본 것들이다.
나는 동계시즌에 5,400미터 이상의 고소에서 BC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11월 26일부터 82일간 한 번도 내려오지 않고 장기 체류를 했다. 82일이란 기간은 5천미터 이상의 고소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러한 경험은 내생애에는 다시는 하기 어려우리라. 아니 다시는 할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고소에서의 생활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회상해 본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순간적으로 교차되는 등반의 긴박한 상황 중에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가져 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굳이 그 이유를 알야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20여년이 지난 지금 많은 후배들이 세계의 모든 산을 열심히들 오르고 있다.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14좌를 완등한 엄홍길 대장이 몇 년전 사석에서 당시에 자기가 85년 동계에베레스트 남서벽팀의 막내로 처음 해외 원정에 참석했었다는 얘기를 하여 새삼 반가웠던 생각이 난다.
요즈음도 히말라야에서의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때의 생각이 새삼 새로워 지는데 그들 역시 자신들이 왜 목숨을 걸고 산을 가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못한채 산을 오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그때 생사를 같이했던 대원들 중에서 김상겸 단장님이 유명을 달리 하셨고 우리나라 산악장비의 개척을 이루었던 홍성암 대원도 이 세상을 떠났다. 그사이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바로 엇그제의 일 같이만 생각이 된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보면 참으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목숨 걸고 힘들게 올라갔다가 결국은 다시 내려 와야 하는데 그렇게 힘들여 올라가고 있으니....
산을 왜 가느냐는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라는 싱겁기 짝이 없는 이유 말고 아주 그럴듯한 의미 부여를 해보고도 싶지만 그 대답은 결국 그냥 산이 가고 싶어서 라는 이유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요즘도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안방처럼 푸근한 국내의 산을 습관처럼 열심히 오르고 있다.
12월 1일 (일)
새벽부터 베이스캠프는 부산하다. 11월 중순에 올라온 선발대가 아이스폴 지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찰을 해 놓았지만 오늘부터 공식적인 동계등반이 시작되기 때문에 모두들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 준비에 바쁘다.
네팔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12월 1일부터 2월 15일 까지를 동계시즌으로 인정을 한다. 그런데 12월 17일경부터는 제트기류가 몰려오기 시작하여 강한 바람으로 인해 등반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17일 이전에 정상공격을 끝내려면 11월중에 C2정도 까지는 비공식적으로라도 캠프 구축을 해 놓아야 만 한다. 그래서 각등반대는 가능하면 베에스캠프에 일찍 도착을 하여 남모르게 루트 공작을 해 놓는 것이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계획을 세워 놓았었는데 한국에서 선편으로 발송한 화물이 인도를 거쳐 카트만두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11월 26일에야 본대가 베이스에 도착을 하였고 우리의 등반대는 예정과 달리 동계등반 허가 날자인 12월1일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등반을 시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아침나절 베이스캠프의 기온은 영하 13도, 하늘은 맑고 바람도 조용해 운행하기엔 문제가 없다. 모든 대원과 셀파가 동원되어 움직인 결과 아이스폴 루트 공작은 저녁때까지 완료하였고 김영대, 박동석 대원은 C1까지 올라가 캠프싸이트 지역을 돌아보고 내려왔다.
한국에서 앵글을 잘라서 제작해 가지고간 확보용 아이스하켄은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있다는 대원들의 보고다.
걱정과는 달리 아이스폴 지역은 상당히 안정이 되어있어 루트공작이 쉬웠고 더구나 지난가을 인도 팀과 일본 팀이 쓰던 사다리들이 상당수 남아있어 작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등반기나 다른 팀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이스폴 뚫기가 상당히 어렵고 위험도 따르며 시간도 꽤 걸린다고 들었는데 너무 수월하게 끝나버려 조금은 싱거운 감마저 들었다.
B. C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아이스폴 지역은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데 마치 종이를 심하게 구겨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C1 지역까지는 약 6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히말라야 설원지역의 특성상 원근감이 없어 아주 가깝게 보이지만 실제로 접해보면 너무나 위험하고 사고가 많아 아이스폴지역은 등반대에게는 악명이 높은 곳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C1까지 휙스 로프가 깔리고 나니 이제 첫 번째 난관은 돌파한 셈이다.
12월 2일(월)
맑은 날씨. 김종호 부대장과 박성우대원이 셀파 2명과 C1 진출을 위하여 출발을 하였고 사다 앙리타를 제외한 11명의 셀파도 20Kg씩 짐을 지고 C1을 향하여 같이 출발을 하였다. 짐을 지고 가는 셀파들은 오늘 중으로 다시 베이스로 돌아와야 한다.
고소에서의 20Kg은 평지에서의 40Kg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에 고소에서는 셀파들의 짐 무게를 20Kg으로 제한하고 있다.
짐은 고사하고 빈 몸으로도 걷기 힘든 곳에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볍게 걸어가는 셀파들을 보면 경외심마저 느끼게 된다. 앙상한 체격에 가느다란 종아리를 보면 그 짐을 지고 몇 발자국 갈 것 같지 않은데 하루에 C1까지 다녀와서는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나하고 같이 뒤늦게 올라온 정부 연락관은 베이스에 도착하자 고소중세를 호소하며 어쩔 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죽을상이다. 할 수 없이 남체에 내려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산 시켰다. 정부 연락관은 등반대가 규정대로 등반을 하는가를 감시하는 역할도 중요 임무중의 하나인데 등반 현장에 없으니 보통 직무태만이 아니다.
12월 3일 (화)
B. C의 아침기온은 영하 15도.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국기게양대의 깃발들이 풀 먹인 천같이 뻣뻣하게 펴져서 깃발의 글자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계획대로 짐 수송을 강행했다. 캠프전진에 따른 짐 수송에 차질이 생길 까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짐분류와 재포장 등을 하느라고 B. C에서는 정신이 없다.
3명의 KBS 보도 대원들은 촬영을 위하여 박동석 대원과 C1으로 출발을 했고 홍성암, 김영대대원도 C1까지 짐 수송을 위하여 셀파 6명과 같이 역시 B. C를 출발하였다.
아이스폴지역으로 빨려 들어가는 작은 점들을 망원경으로 열심히 살피다보니 휙스로프에 매달려 설벽을 힘들게 올라가는 기자들의 모습이 불안하게 보인다. 특히 몸이 가냘프고 체력이 약한 김창훈기자의 걷는 모습은 어린 아기가 걸음마 하는 것 같아 우습기까지 하다.
김 기자는 지난번 루크라에서 이곳 B. C까지 카라반을 하는 도중 고소증세로 일행에서 쳐저 페리체에서 혼자 남아 있었는데 뒤늦게 정부연락관과 올라오던 나를 만나자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하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C1의 김종호 부대장과 박성우대원은 까미체링과 갈첸 두 명의 셀파를 데리고 C2까지 루트 정찰을 다녀왔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보고다.
우리 베이스 옆에 같이 캠프를 설치하고 있는 김기혁 대장의 서능 팀도 로라능선 까지의 루트공작을 위해 연일 바쁘게 움직인다.
이번 동계에베레스트는 이곳 베이스캠프지역에 한국 팀만 3팀이 집결하여 등반을 시도하고 있다.
동남 능의 우리 고대 팀과 서능코스의 김기혁 대장팀, 박영배 대장의 남서벽 팀이 동계시즌에 에베레스트에 집결을 하여 한국은 물론 세계 산악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12월 4일 (수)
영하 6도로 기온은 비교적 높은 편인데 바람은 제법 세게 분다. 가장 많이 지친 2명의 셀파는 쉬도록 하고 나머지 7명의 셀파에게 140Kg의 짐을 C1까지 수송토록 하였다.
규정상 셀파들은 3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되어 있으나 기상관계로 정상공격 날짜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겨야 하는 지금상황에서는 캠프전진에 필요한 물량공급을 조금이라도 많이 하기 위해서는 조금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운행하기 싫어하는 셀파들에게 임금을 두 배 주겠다고 하니 두말없이 나선다. 돈을 벌기 위하여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짐을 지고 나서는 셀파들의 뒷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든다.
어느 정도의 짐 수송이 이루어짐으로 해서 홍성암 대원과 니마옹추, 니마도루지를 C1까지 진출하도록 하고 C1에 있던 김종호, 박성우대원은 C2로 올려 보냈다.
4일 만에 C2(6,400M)까지 캠프를 구축했으니 예상보다는 빨리 캠프 전진을 한 셈이다. 부디 더도 덜도 말고 이렇게만 운행 일정이 진행 된다면 한번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C2는 전진베이스 캠프로서 정상공격 날짜를 빨리 잡기 위해서는 C2까지 대원과 식량, 장비 등을 최대한 빨리 올려야 한다.
C2에 올라간 김종호 부대장의 무전에 의하면 C2지역에는 지난 가을 8천 미터 사우스콜에서 6명의 사망자를 냈던 인도 군인팀이 사용하던 대형 폴라텐트 2동이 사용이 가능한 상태로 남아있고 식량 등도 많이 있어 유용하게 쓸 수 있겠다는 보고이며 C1에도 폴라텐트의 잔해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인도 팀은 대형사고후 철수하는데 어지간히 상황이 급했던 것 같다. 인도 팀의 경우 등반대의 전문 장비 보다는 폴라텐트와 기타 군수용품을 많이 사용한 것을 보면 등반 비를 줄이기 위하여 군인들을 대원으로 선발하고 군용물품을 사용해 등반을 시도한 것 같다.
12월 5일 (목)
“바라사부 티”(대장님 차 드십시오)
이른 아침이면 키친보이가 텐트 앞에 와서 아침 인사겸 차를 권하는 바람에 싫어도 일어나서 차를 마셔야한다. 셀파들은 대원은 사부, 대장은 바라사부라고 부른다.
히말라야 원정이나 트레킹을 해보면 누구나 경험하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차를 참으로 많이 마신다. 카트만두에서도 그랬지만 산에 올라오니 셀파들은 더욱 열심히 차를 마신다. 앉기만 하면 계속 차를 마시는데 카트만두에 있을 때 먼저온 어떤 원정팀이 충고하기를 설탕을 셀파들에게 맡기면 설탕 한 달 분량이 3, 4일이면 다 없어지니 설탕을 셀파들에게 절대 맡기지 말라고 충고 하던 것이 생각난다. 고산에서는 물을 많이 마셔야 고산병에 안 걸린다고 하여 열심히 마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먹는 양은 셀파들의 1/3도 안 되는 것 같다.
아침나절 C1으로 부터 급한 무전 연락이 왔다.
캠프1에 올라간 김창훈 기자가 고산병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내려갈 수 있도록 조처 바란다는내용이다.
“지금 그곳에는 김 기자와 같이 내려올 수 있는 인원이 없지 않은가, 괴롭겠지만 오후에 이곳에서 짐수송하는 셀파들이 올라가면 같이 내려오기 바란다.
“상황이 급합니다. 잠시도 참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지난밤에 몹시 고생을 해서 더 견디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올라갈 때는 용감했지만 역시 걱정했던 대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참다못한 김 기자는 C1에서 취사를 담당하고 있는 키친보이의 안내로 완전히 크로키가 되어 B. C로 내려 왔다.
고산병은 참아서 될 일은 아니다. 잘못하여 뇌수종이라도 걸리면 그야말로 목숨까지도 잃을 수가 있다. 고산병의 최고 치료 방법은 아래 지역으로 내려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얼마나 죽겠으면 C1에서 대원들의 식사를 담당하고 있는 키친 보이를 데리고 내려올 생각을 했을까?
B. C 에 도착하자마자 김창훈 기자는 텐트 안에 들어가더니 누워서 꼼짝도 못한다.
C2에 어제 올라간 김종호, 박성우대원은 하루 휴식을 하고 있고 셀파들에 의한 짐 수송은 오늘도 쉬지않고 계속되었다.
12월 6일 (금)
C1의 홍성암, 김영대 대원은 C2로 진출을 하고 박동석대원은 셀파들과 C2까지 짐 수송을 한 뒤에 다시 C1으로 되돌아왔다.
낮부터는 점차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염려하던 바람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내색들은 하지 않지만 점차 내려가는 기온과 제트기류에 의한 강풍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 할 것인가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시속 150km에서 200KM 이상 부는 바람 앞에 과연 우리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지는 기온에다가 바람으로 인한 체감 온도는 어느 정도인가 도저히 상상이 안긴다.
그동안 수송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던 사다인 앙리타는 겔젠과 같이 C1을 거쳐 C2까지 하루 만에 간단히 올라가 버렸다.
앙리타는 그동안 에베레스트 정상을 3번이나 올라간 셀파들 세계에서는 신화적인 존재로서 정상 공격 시에도 산소를 쓰지 않는다. 나이는 나와 같은 43세인데 아직도 체력은 젊은이 못지않다. 우리대원들은 C1까지 하루, 그리고 C1에서 하루나 이틀 고소적응을 한 뒤에 다시 어렵게 C2까지 올라가는데 앙리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C2까지 고도차 1,000미터를 하루 만에 극복해 버리니 그의 등반능력에 새삼 놀랄 뿐이다.
셀파들의 경우 높은 지역에서 상주하는 관계로 고소적응이 되어있어서 처음 올라온 우리 대원들보다는 훨씬 났겠지만 그들 간에도 개인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체나 로부제등 높은 지역에 살던 이곳 사람들도 오랫동안 카트만두나 고도가 낮은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높은 산에 올라오면 한동안은 우리와 같이 고산 증세로 고생을 한다.
12월 7일 (토)
등반이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바람 또한 잔잔하니 오래간만에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다.
보통 우리는 하늘은 푸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는 하늘은 푸르다 못해 검은 색
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러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곳 하늘을 보니 우리의 하늘을 가지고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고도 5,400M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지역에서 공해니 스모그현상이니 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얘기다. 밤이면 넓은 하늘에 빈틈없이 꽉 차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엄청나게 큰 별들의 모습이 경이롭고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보다 두 배는 크고 밝아 보이는 달의 모습도 신비롭다.
햇볕이 따뜻한 한 낯, 텐트 주위에 의자를 펴놓고 단장님과 김창훈 기자와 둘러앉아 애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잠시 휴양을 온 듯 한 착각에 빠져 든다. 엊그제 C1에서 크로키가 되어 내려왔던 김창훈 기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멀쩡하다. 5400m의 베이스캠프는 트레킹 팀이 올라 올수 있는 최고의 높이 이다. 베이스 이상을 올라가려면 정식으로 등반 허가를 받아야 한다.
5천 미터의 고도는 산소가 부족하여 사람이 장기간 생활하기가 힘든 지역이다. 공기의 부력으로 비상을 하는 헬기가 올라갈수 있는 최고의 높이는 6000미터가 한계라고 하는데 이곳 베이스에 내렸던 헬기가 이 지역의 기압이 낮아져 이륙을 못해서 애를 먹었다는 얘기도 결국은 산소가 평지보다 얼마나 희박한가를 말해 주는 증거다.
지난해 정찰을 위해 이곳 베이스까지 올라 왔을 때 너무나 고생을 하였고 이번에도 처음 며칠간은 고소적응을 위하여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너무나 편안한 것이 사람의 적응력이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의아해진다.
오늘 기온은 처음 B. C에 도착 했을 때보다는 훨씬 낮아져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는 기온이 조금은 두려운 생각이 든다.
베이스의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위에서는 오늘부터 C3루트 공작이 시작 되었다.
7,200M의 C3는 C2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5천대에서 6천대를 극복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데 6천대에서 7천대를 가기는 더욱 어렵다.
7천대의 C3는 정상공격의 가능성과 실패를 예시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C2까지 활발하게 짐 수송을 하던 셀파들도 C3는 조금 주춤 한다. 셀파들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7천대 까지 쉽게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김종호 부대장이 사다 앙리타, 겔젠과 같이 약 1시간 반 정도 걸려 C2에서 설원의 끝에 있는 베르그슈른트에 도착을 한 뒤 이어서 시작되는 로체훼이스의 급경사면에 약 100M 정도의 휙스 로프를 설치한 뒤 돌아왔다.
베르그슈른트 : 크레바스는 빙하위의 갈라진 균열을 말하며 설원과 산사이의 크레바스를 베르그슈른트라 칭한다.
히말라야의 설원지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곳이다. 원근감이 없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 같은데 걸어도 걸어도 거리가 줄지를 않아 나중에는 절망감마저 느끼게 하며 터질 것 같은 심장,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중량감, 고소에 의한 무력함은 내 자신을 너무나 초라하게 한다.
빠른 사람이면 1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늦은 사람은 3-4시간이 걸려도 가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그 차이는 심해지는데 고소 적응이 되면 같은 거리를 상당히 빨리 갈수가 있다.
C1에 있던 박동석 대원과 정성근, 백승민 기자가 C2로 올라갔는데 C1과 C2 사이의 설원지대에서 역시 엄청나게 고생을 한 모양이다. 어떻든 훈련도 안 된 기자들이 의욕 하나만 가지고 6,400M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은 정말 높이 사줄 일이다.
그동안 조마조마하던 아이스폴이 드디어 문제를 일으켰다. 아침에 B. C를 출발하여 C1까지 짐 수송을 하던 2명의 셀파가 아이스폴 마지막 부분이 무너지는 바람에 올라가지를 못하고 그곳에 짐을 놓고 내려와 버렸다. 그들의 얘기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빙하지대의 아이스폴은 빙하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흘러내리는 속도가 달라서 어느 순간 아랫 부분에 빈 공간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위에 있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빈 공간 부분으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데 그러다 보면 그 주위의 지역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눈들이 무너지고 쓰러져 엉망이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시에 그곳 현장에 있었다면 꼼짝없이 눈 속에 묻혀 버리게 되고 그러면 눈 속에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일단 내일 다시 현장을 조사해본 뒤에 조처를 취하기로 했다.
12월 8일 (일)
기온이 점차 내려간다. 날씨도 좋지 않고 바람의 강도도 점점 세어지기 시작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 진다. B. C에 앉아서 무전기 들고 지휘만 하고 있자니 답답하고 위의 사정을 실감할 수가 없어 내가 직접 전진캠프인 C2로 올라가기로 했다. 대장이 같이 움직이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진다.
대원들과 셀파들에게 무언의 자극제가 되리라 기대하며 아침에 장경순 대원과 C1으로 출발을 하였다. 우리보다 먼저 어제 무너진 아이스폴을 보수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까미체링과 앙다와가 출발을 하였고 5명의 셀파도 짐을 지고 뒤따라 출발을 하였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도착한 셀파들은 무너져 내린 부분이 너무 엄청나서 그들 자체만으로는 보수를 할수없어 짐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전부 하산을 하였다.
셀파들은 짐을지고 걷는 것은 잘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부족해 위험한 부분은 우리 대원들의 지휘가 있어야 처리를 한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힘든 아이스폴 지역을 이를 악물고 올라가던 나도 하산하는 셀파들을 따라 다시 B. C 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B. C를 출발하며 김상겸 단장님과 요란스럽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다시 B. C로 돌아오자니 조금은 쑥스럽다.
C2의 홍성암 대원과 박성우 대원은 고소증세가 있어 C1으로 내려왔고 정성근, 백승민기자도 고소 때문에 내일 하산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역시 6천대 이상의 고도는 그리 만만치가 않은 것 같다.
12월 9일 (월)
이곳에 오니 요일의 개념이 없어진다. 날씨가 나쁜 날은 노는 날이고 좋은 날은 운행을 하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안의 온도를 보니 영하 13도를 가리킨다.
오늘도 역시 셀파들은 아이스폴 수리를 위하여 일찍 출발을 하였고 나도 뒤늦게 장경순 대원과 함께 다시 C1을 향해 출발을 하였다.
“남대장 오늘도 가다가 힘들면 되돌아 올 건가?” 단장님이 은근히 놀린다.
“어제 되돌아 온 게 어디 제 탓입니까? 아이스폴이 무너져서 할 수 없이 온 거지요.”
단장님께 큰소리는 쳤지만 어제 힘들었던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안 선다. 그사이 운동을 하지 않고 텐트 안에 쪼그리고 앉아있기만 해서 몸이 굳어 더욱 힘이 드는 것 같다.
막상 출발은 했는데 플라스틱 이중화에 오버트라우져, 스패츠, 아이젠으로 중무장을 하고나니 한발 움직이기가 힘이 든다.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주저앉고만 싶다. 5분가고 10분 쉬고 그러기를 2시간. 진행한 거리는 몇 백 미터도 안 되는 것 같다. 다행히 장경순 대원만 있어서 망정이지 셀파나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면 무슨 망신인가?
지난번 김창훈 기자가 올라가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웃던 생각이 난다. 내가 김 기자 비웃었다가 호된 벌을 받는가보다고 뒤늦은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비극은 시작된 것 같다.
지금쯤 밑에서는 단장님이 망원경으로 관찰을 하고 있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보았지만 천근만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셀파들이 네발로 기어서 건넜다는 크레파스의 사다리 설치 지역에 도착해 보니 크레파스 끝이 보이지 않고 시커먼 구멍은 그야말로 악마의 소굴 같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 몸으로 휘청거리는 사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면서 밑을 보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아 나 때문에 덩달아 기다려야하는 장경순 대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곳저곳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크레파스에 사다리 설치하느라고 우리 대원들이 고생께는 했겠다.
정말 너무나 힘이 든다. 아니 도대체 힘을 쓸 수가 없다.
아이스폴 수리 때문에 올라온 셀파들이 마주치자 인사를 한 뒤 휘휙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날렵하게 오르내린다. 나는 기어가는데 셀파들은 날라 다니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바라사브 힘내세요!”
바라사브 체면은 오늘 완전히 구겨졌다.
기어가다시피 아이스폴을 3분지 2정도 올라갔을까? 셀파도 없이 내려오는 정성근, 백승민 두 기자를 만났다.
완전히 지친 모습의 두 사람은 오히려 나를 동정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위에 아이스폴이 어때?”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말도 말아요. 아주 왕창 무너졌어요. 내려올 때 군대 가서 유격훈련 받은 덕을 아주 톡톡히 봤어요”
정말 혼이 나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겁주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자기들은 내려오는 길이라고 어려운 사정을 입에 거품을 물면서 설명을 장황하게 한다.
“여기서 C1까지 얼마나 걸릴까?”
“지금이 세시 반이니 아마 6시전에 도착하기는 힘들 걸요?”
나를 무시하는 투가 역역하다.
“무슨 소리야! 요 앞이 C1인데 무얼 그렇게 오래 걸려. 5시 까지는 충분히 도착할 수가 있어”
백 기자가 제안을 한다.
“그래요? 대장님 그러면 내기 합시다. 만약 6시 까지 도착을 하면 내가 성을 갈고 도착을 못하면 대장님이 성을 갈아야 됩니다”
이건 아주 막가자는 얘기다. 나를 알기를 누구 말처럼 흑싸리 껍질로 알았다.
“좋다 백승민 너 남씨로 성을 갈아야 돼”
기자들과 헤어진 뒤 조금 더 올라가 보니 “맙소사” 좁은 계곡 전체가 폭격 맞은 건물처럼 폭삭 주저 앉아 있고 5,6층 높이 정도의 수직 벽이 겁나게 앞을 가로 막고 있다.
날씨는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기온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까미체링이 설치하다가 끝내지 못한 사다리가 직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사다리 세 개를 연결해서 직벽에 세워놓았는데 윗부분은 사다리가 모자라 휙스 로프로만 연결만 해 놓았다.
사다리 정도야 하고 막상 오르기 시작하자 그게 아니다.
왕년에 선인봉의 표범 길도 간단히 오르던 실력이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마지막 부분은 사다리가 없어 아이젠과 피켈로 찍고 올라가야 하는데 도대체 힘이 안 먹힌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쓴 뒤에 입에 거품을 물고서야 올라 설수 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옛날의 빙벽 실력이 어디로 도망을 갔나?”
아! 그런데 올라서면 바로 C1인줄 알았던 위지역이 캠프사이트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이럴 수가! 절망감과 함께 날은 어두워지고 완전히 탈진된 상태에서 바람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기온은 사정없이 떨어지며 공포감이 엄습해 온다. C1지역은 크레파스가 산재해있어 아차하면 순간적으로 끝도 보이지 앉는 골짜기로 떨어져 버린다. 크레파스를 피해 돌고 도는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일이 아주 난처하게 되어 버렸다. 드디어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추위가 심해지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졸음은 위헌신호다. 그 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고 싶다. 눈을 감은 채 앞서가는 장경순 대원을 비틀대며 무의식적으로 쫒아간다.
“이러다가 여기서 내가 죽고 말지”
경황 중에도 나 때문에 늦어지는 장경순 대원에게 먼저 빨리 가라고 하니 조금만 참자고 용기를 북돋는다.
대장 혼자 놓고 가면 주저앉아 잠들어 버릴 것이 뻔 한데 갈 수가 있나. 그도 대장 잘못 만나 고생이 막심하다.
이때 B. C 에서는 난리가 났다. 해가 완전히 지고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대장이 C1에 도착을 못했다니 이것은 무슨 일인 난 것이 틀림없다.
단장님은 계속해서 C1을 불러 댄다.
“대장 도착 했나?”
“아직 도착을 안했습니다”
똑같은 통화를 반복하다가 답답해진 단장님은 C1의 홍성암 대원에게 빨리 랜턴을 가지고 나가보라고 재촉을 하셨다.
홍성암 대원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걱정이 되어 내려오는 것을 허우적거리며 걷다가 C1 캠프 사이트 아래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랜턴 불빛을 보는 순간
“아 이제는 살았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다가오는 불빛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 질 수가 없다. 홍성암 대원의 인도로 텐트에 도착을 하니 박성우 대원이 뜨거운 차를 끓여 놓고 있다가 마시라고 내준다. 베이스를 출발한지 무려 8시간, 거리래야 5km정도 밖에 안되는데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C1 지역은 생각보다 주위 환경이 몹시 불안하다. 사방이 시커먼 크레파스로 둘러싸여있고 겨우 텐트 3, 4동 칠 자리밖에 여유가 없는데 이 지역 전체가 아까 본 아이스폴 지역처럼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C1 캠프사이트의 주위 환경이 이렇게 열악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6,100미터의 C1을 올라오는데 나처럼 요란스럽게 올라온 사람은 또 없을 거라고 혼자서 한탄을 하였다.
그렇지만 베이스의 단장님과는 큰 소리를 치며 교신을 하였다.
“ 남 대장 왜 늦었어? ”
“ 수직 벽의 사다리가 설치가 다 안 되어 그곳에서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랬습니다”
수직 벽은 마치 나 혼자만 지나온 것처럼 궁색한 변명을 하노라니 조금은 쑥스럽다. 그러나 그 시간 B. C에서는 내 성은 이미“남”씨에서“백”씨로 바뀐 다음이었다.
C1의 첫날밤은 텐트가 날아갈 듯 한 요란한 바람이 대 환영회를 베풀어 주었다. 5,400의 베이스와 6,100M의 C1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었다.
12월 10일 (화)
오늘은 C2에 있던 대원들이 C3로 진출하는 날이다. 그런데 C2에서 사고가 발생을 했다.
식당 텐트로 사용하던 인도 팀이 남기고간 폴라텐트 한 동이 취사용 가스가 샌 것을 모르고 키친보이가 아침에 불을 피우다가 폭발을 한 것이다.
그 바람에 텐트는 전소되었는데 다행이도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은 급히 피해 다친 사람은 없지만 셀파들의 장비가 타버려 오늘 C3로의 진출이 불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 부상자는 없는가?”
“ 예 입고 있던 옷과 신발 등이 약간 타고 텐트 안에 있던 장비는 모두 타버렸습니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시일도 촉박한 판에 셀파들 장비가 타버렸다니 난감해 진다.
“ 부상자가 없다니 다행이다. 우선 급한 대로 공격조가 아닌 대원들의 장비를 걷어 줄 테니 필요한 장비 목록을 작성하여 셀파들을 내려 보내기 바란다.”
“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B. C 의 단장님, 기자들과 내가 입고 있던 우모복, 장갑 등을 벗어서 셀파들에게 주었다.
C1에 있던 핀조 셀파가 고산증세로 신음을 하여 B. C 로 내려 보냈고 그동안 고산증세로 남체에 있다가 사흘 전 B. C에 뒤늦게 올라온 정부 연락관도 다시 고산증세가 심해 오늘 아래 마을로 다시 하산을 시켰다.
정부 연락관은 학교 선생인데 이번에 우리 연락관으로 배정을 받았다. 그는 원정대의 관광성 부리핑 관계로 카트만두에 남아있던 나와 뒤 늦게 베이스까지 같이 왔었는데 베이스에 도착하자마자 두통을 호소하여 할 수 없이 남체로 하산을 시켰었다. 그런데 이번에 올라 온 뒤 며칠 안 되어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내려간 것이다.
이래저래 오늘은 모든 일이 안 되는 날인가 보다. 바람도 거드는지 엄청나게 불어대는 바람에 텐트가 지탱을 못할 것만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저녁 무렵에는 루트 공작을 나갔던 서능 팀 대원이 강풍 속에 귀환을 못하여 서능팀은 비상이 걸리고 대원을 찾는 무전기 소리가 애타게 들려온다. 부디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좁은 협곡에 위치한 C1지역은 골바람이 센데다가 점차 제트기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바람의 강도가 세어지는데 그 위세가 자못 심각하다. 부디 일시적인 현상이기를 기대하며 밤새 바람과 씨름을 하였다.
12월 11일 (수)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뚝 떨어지고 해가지면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니 운신하기가 힘이 든다. 텐트 밖은 너무추워 나가기가 힘들어 좁은 텐트 안에서 취사부터 모든 일을 해야되니 옹색하기 짝이 없다.
C1부터는 효동기업에서 특별히 제작한 차이나 에베레스트 3인용 텐트를 쓰고 있는데 부피가 큰 장비들을 텐트 안에 들여 놓으면 두 사람이 움직이기에도 힘이 든다.
이 텐트는 사람이 위에 올라가 있어도 끄덕없을 만큼 강도가 좋아 웬만한 바람은 걱정이 안된다.
캠프 전진을 위하여 애를 쓰고 있던 김기혁 대장의 서능 팀이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를 한다는 소식이 왔다. 어제저녁은 등반 중에 조난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 바람에 밤늦도록 교신을 하느라고 무전기가 요란했었는데 마침내 등반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이번에 우리가 사용한 무전기는 일제 KENWOOD TH21 144MHz로 FM 1W짜리인데 채널이 100개나 되지만 서능팀과 채널 구분이 되지 않아 서로의 교신 내용이 혼선이 되는 바람에 교신 시간을 짝수, 홀수시간으로 구분하여 사용키로 약속을 하였었다.
우리역시 무전교신 내용을 듣고 사고내용을 알게 되어 어제저녁 일에 대해 같이 걱정을 하던 차였다.
C2의 김종호, 김영대, 박동석대원과 5명의 셀파가 C3 진출을 위하여 무리하게 출발을 했지만 정신없이 불어대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B. C에서 C1까지 짐 수송을 하던 셀파들 역시 바람 때문에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우려하던 바람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12월 12일 (목)
오늘도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댄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바람 때문에 운행을 중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폭설이나 폭우가 아닌 단지 바람 때문에 운행을 못한다니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날 사진을 찍으면 바람은 사진에 찍히지 않으니 아주 쾌청한 날로 보인다. 촬영담당 백승민 기자에게 바람 불 때 실감나게 한번 찍어보라고 하니 찍으나 마나라고 대꾸도 안한다.
그러나 저러나 캠프전진이 늦어져 큰 걱정이다.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12월 17일 이후에는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정상 공격이 힘들다고 하는데 이대로 가면 17일을 넘겨야 될 것 같아 초조해 진다.
B. C 의 단장님과는 할 일 없이 날씨 때문에 맥 빠진 교신을 한다.
“지금 C1에는 바람이 대단합니다. 텐트가 금방 무너질 것 같아 등으로 간신히 받치고 있습니다”
“ 이곳 베이스는 그렇게 심하지 않은데 그곳은 정말로 바람이 많이 부나?”
“ 말도 마십시오. 텐트가 1미터는 떴다 갈아 앉았다 합니다.”
“ 무슨 소리, 아무래도 뻥이 너무 센 것 같다. 어떻게 텐트가 1미터를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가 성을 바꾸더니 사람이 변했다”
성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아이스폴 올라올 때 백 기자와의 내기 때문에 얻어진 선물이다.
12월 13일 (금)
밤새 바람 때문에 잠을 설쳤다. 언제 텐트가 무너질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서능 팀 텐트가 바람에 박살이 났다고 하는데 우리텐트라고 보장 받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사용한 텐트는 일본 가모시까 제품으로 세계 최강이라고 자랑하던 텐트였는데 우리 것은 어떨 런지 점점 불안해진다.
더구나 오늘은 공교롭게도 서양 사람들이 가장 재수 없는 날로 여기는 13일에 금요일이라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오늘이 나의 제삿날이 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자꾸만 재수 없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온 밤이 지나도록 텐트는 잘 버텨 주었다. 텐트에게 고마운 마음이 절로 난다.
오후 들어 바람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홍성암, 박동석 대원과 6명의 셀파가 재빨리 C3를 설치하고 돌아왔다. C2를 12월 4일 설치 한 뒤 9일 만에 C3를 설치 한 것이다.
C1에 체류하는 인원이 적어 4동의 텐트 중 2동은 철거하여 C2로 이동 시켰다.
12월 14일 (토)
C1에는 장경순 대원 혼자만 남겨놓고 9시에 박성우 대원과 C2를 향해 출발을 했다. 기온은 낮으나 바람은 조용해 운행에는 걱정이 없다. C2 캠프 싸이트는 에베레스트 남서 벽과 로체 벽으로 둘러싸인 말굽형태의 게곡 안으로 로체 훼이스를 바라보며 한 없이 걸어가야 하는 설원 지대이다.
실제의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고소에서의 몇 키로는 평지에서의 몇 십 키로 보다 멀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을 향해 하루 종일 걸어도 거리가 줄지를 않아 사람의 인내심이 어다 까지 인가를 실험하는 곳이다.
계곡을 가로질러 형성된 수 많은 크레파스를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바로 몇십 미터 앞을 가기 위해 한 시간 이상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
고도가 6천 미터가 넘으니 분명 높긴 높은 곳인데 그렇다고 이렇게 걸음이 느릴 수가 있나? 한 발짝 걸으면 두발 짝 뒤로 물러나는 듯 한 착각이 든다.
다른 시즌에는 햇빛이 나면 복사열로 인해 더워서 고생을 한다는 지역이지만 맑은 날씨인데도 너무나 춥다. 동계시즌은 역시 차원이 다르다. 발끝이 몹시 시려 온다.
한발, 두발 발걸음을 30까지 센 뒤에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을 하는데 나중에는 힘이 들어 30걸음이 20걸음으로 줄어든다. 시간은 어느새 2시경, C1을 출발 한지 4시간이나 지났다. 그동안 걸은 거리는 4KM도 안 된다. 비틀거리며 걷다보니 약간 높은 지역에 검은 돌들이 보이고 그곳에 폴라텐트와 몇 동의 작은 텐트가 보인다. 마침내 C2에 도착을 한 것이다.
결국 나의 인내의 한계는 여기가 끝인 것 같다. 건네주는 따뜻한 찬 한잔을 받아들 힘도 없다. 텐트 주위에 몰려있는 까마귀들이 먹을 것을 찾아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까마귀들은 8천 미터 싸우스콜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새들 중에서도 까마귀들이 특히 강한 새들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비상하는 까마귀들을 보면서 그렇게 힘들여 올라온 내 자신이 허망하기까지 하다.
C2에 있던 김종호, 김영대 대원은 아침에 짐을 운반하는 3명의 셀파와 같이 C3로 올라갔다. 우리 대원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C2에서 부터는 셀파 운행시에 별도의 보너스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C3까지 가는 셀파들은 몇 명 안 된다. 셀파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하여 김종호 부대장이 셀파들과 약속하기를 C2이상 운행 시 하루 300루피씩 주기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세부적인 문제들도 등반 전에 셀파들과 미리 약정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사고가 발생했을 시에도 보험금 이외의 보상 문 제등을 사전에 거론을 해 두는 것이 사후 처리가 편안해 진다. 또 정상 공격 시 특별 보너스라던가 B. C 이상에서 다른 등반대가 남겨놓은 장비 등을 습득했을 시의 소유권 문제등도 체크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셀파들의 성격은 아주 단순해서 이해관계에 아주 민감하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등반에 참여하는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은 전에 장비나 보너스를 아무리 많이 받았더라도 나중에 임금 계산 시에 조금만 자기에게 손해다 싶으면 강력하게 반발을 한다.
이곳에서 원주민들과 원정대 간에 시비가 생기면 이곳 경찰이나 관공서에서는 무조건 원주민 편이다. 내가 잘했다고 우겨봐야 별 소용이 없다. 이곳 사람들을 상대할 때 특별히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C3로 향하던 김종호 부대장이 로체훼이스에서 무전기를 떨어트려 분실하는 바람에 C3 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짐 수송을 마치고 C2로 돌아온 셀파들의 애기를 듣고 급한 대로 C2의 무전기를 C3로 올려 보내고 C1에 혼자 남아 있던 장경순 대원에게 C1의 무전기를 C2로 올려 보내도록 지시했다.
12월 15일 (일)
오늘이 12월 15일이니 정상 공격을 할 수 있는 날자가 별로 없다. 마음만 급할 뿐 캠프 전진이 시원스럽게 되지 않아 마음만 답답하다. C3에 올라간 김종호, 김영대 대원은 마음이 급해 쉴 시간도 없이 로체훼이스에 올라가 급경사면에 휙스로프를 설치하였다.
지난 가을의 인도 팀은 C3캠프싸이트에서 직상을 하였다가 상단부에서 왼쪽으로 트레파스를 하여 싸우스콜로 올라갔는데 우리의 경우 코스가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거리를 줄이기 위하여 청빙이 노출된 로체훼이스 벽을 가로 질러 제네바스퍼까지 간 후에 싸우스 콜로 직상하는 루트를 택했다.
김영대 대원이 고소증세가 온다고 하여 오후에 하산시키고 C2에 있던 박동석 대원을 C3로 올라가도록 했다. 저녁때 내려온 김영대 대원은 우황청심환을 먹은 것이 더 안 좋아 밤새 토하면서 고생을 하였다. 체력이 좋아 항상 셀파보다 앞장서서 걷던 김영대 대원이 크로키가 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적은 인원중 정상공격 멤버가 부족해 자못 걱정이 된다.
나도 C2에 올라온 뒤 고소증세로 컨디션이 별로 좋지를 않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서 참기가 어려운데 내색도 할 수 없고 참으로 죽을 맛이다.
오늘 서능 팀이 완전히 철수를 했다는 소식이 왔다. 또 서능 팀과 교대하듯이 올라온 박영배 대장의 남서벽 팀은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해서 설치해 놓은 아이스폴 사다리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어차피 설치해놓은 것이지만 길이 무너지면 계속 보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 이용만 하자는데 화도 났지만 같은 한국 팀끼리 야박하게 할 수 없어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사다리를 살만한 자금이 부족하면 먼저 올라와서 아이스폴 루트 공작 때에 같이 협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12월 16일 (월)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으나 운행에는 별 지장이 없는 날씨다. C3의 박동석과 사다인 앙리타가 싸우스콜 까지 루트를 뚫기 위하여 작업을 하면서 아주 애를 먹은 모양이다.
7천 미터가 넘으면 빈 몸으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곳인데 장비를 지고 휙스로프를 설치해가며 루트를 뚫기란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침나절 C3를 출발하여 박동석 대원과 사다가 앞에서 휙스로프를 설치하며 전진을 하면 C3에서 출발한 겔젠, 니마옹추, 니마도루지등 세 명의 셀파가 짐을 지고 뒤쫓아가 C4에 짐을 데포 시켜놓고 내려오기로 했는데 C3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 명의 셀파가 올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머뭇거리는 모습이 망원경에 보인다.
의아한 마음으로 계속 주시하고 있노라니 올라가야할 친구들이 반대로 하산을 하고 있다. DUD문을 몰라 계속 망원경으로 관찰을 하고 있는데 C2에서 C3로 올라가던 홍성암 대원과 베르그슈른트 상단부에서 만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홍성암 대원으로부터 보고가 왔다. 셀파중의 니마도루지가 고산 증세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니마도루지만 내려오고 두 사람은 올라가야지 다 같이 내려오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태업을 하는 것 같아 몹시 화가 나서 이들을 당장 해고시키고 싶었지만 성질이 나는 대로 할 일은 아니다. 셀파들 하고 계속 갈등을 일으키다 보면 결국 등반을 포기해야 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셀파 들이라고 C3, C4 가리지 않고 다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셀파 중에서 C3이상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나마 그들이라도 없으면 방법이 없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화가 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C2로 다시 내려온 그들을 야단을 치지 않고 오히려 수고했다고 하니 순진한 그들은 미안해서 얼굴을 못 든다.
셀파들도 싸우스콜 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역시 두렵고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들 중 니마옹추는 할 수 없이 내려온 눈치다.
그에게 슬며시 너는 상당히 강한 셀파로 알고 있는데 올라가지 않고 왜 내려왔느냐고 물어보니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말을 못한다.
우선 상황이 급해서 꾀는 부렸지만 천성이 순진해서 끝까지 변명을 못한다.
그동안 C1에서 혼자 남아 무전 중계를 하던 장경순 대원이 혼자 버티기가 어려 것 같아 C1은 텐트 2동만 남겨놓고 C2로 올라오게 했다.
베이스는 아이스폴 아래에 뚝 떨어져 있어 C2와는 날씨가 나쁠 때는 무전교신이 잘 되지를 않아 C2 지역에 무전 중계 안테나를 설치할 필요성이 있다.
싸우스콜의 높이가 7,980M. 싸우스콜까지의 루트 작업을 하던 박동석 대원과 앙리타는 마지막 40여 미터를 남겨놓고 일몰 시간이 되어 급히 하산을 서둘렀지만 C3도착 시간이 너무 늦어져 밑에서는 몹시 걱정을 하였다.
무전 교신이 잘되지 않아 더욱 걱정이 되었는데 뒤 늦게 도착했다는 연락이 와서 겨우 안심을 하였다.
12월 17일 (화)
오늘이 겨을 등반의 데드라인으로 알고 있는 날인데 우리는 아직 싸우스콜도 진출을 못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또 악화되기 시작한다.
지쳐있는 C3의 대원과 셀파 들을 모두 C2로 철수 시켰다. 7,400M인 C3에서의 장기 체류는 체력을 현저하게 감소시킨다.
더구나 수면 시에는 피와 같이 아까운 산소를 사용해야 하는 관계로 더욱 문제가 된다. C3에서는 4명이 수면 시 하루에 한통을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가 준비한 산소량은 20통 밖에 안 된다. 잘못 하다가는 정상 공격 시에 사용할 산소까지 바닥이 날판이다.
어제 운행 중에 고소증세라고해서 짐을 놓고 내려온 3명의 셀파중 원흉인 니마도루지를 베이스로 내려 보냈다. 아무래도 미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하는 짓마다 신경에 거슬린다.
12월 18일 (수)
등반 시작 후 최대의 악천후다. 그렇지만 오늘은 기필코 C4까지 진출하고자 C2에 있던 사다를 비롯한 4명의 셀파를 아침 7시에 출발 시켰다. 그러나 역시 운행은 불가능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쌓인 눈이 심한 눈보라처럼 날린다. 다와타망은 C3에서 하산을 했고 나머지 3명은 싸우스콜 밑에 까지 갔다가 짐만 데포 시켜 놓고 하산을 하고 말았다.
뒤쫓아 가던 김종호, 홍성암, 박동석 대원도 결국 쫓기듯이 C2로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온천지를 뒤흔들 듯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그야말로 완전히 기를 죽인다. 가을까지 4,5미터씩 온 눈이 이런 바람 때문에 다 날아가고 바닥이 노출될 정도이니 알만하다.
히말라야의 몬순은 년 2회, 여름과 겨울에 있는데 여름 몬순은 우기로서 6월에서 9월 사이이며 비와 무더위가 계속되고 겨울 몬순은 11월에서 2월까지로 이 기간은 건조기이다.
등반대의 경우 대부분 이 몬슨 기간을 피해서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에 등반을 한다. 몬슨 기간에는 저지대에서는 안정된 날씨가 계속되지만 산악지대에서는 강풍이 거세게 분다. 우리는 지금 겨울 몬슨 계절속에 강풍과 혈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시속 200km는 초속으로 약 55m 가 된다. 우리가 등산 상식에서 말하기를 초속 10m가 되면 작은 나무줄기가 흔들리고, 15m가 되면 보행하기가 힘들며, 초속 20m가 넘으면 나무 가지가 부러지거나 기왓장이 날라 간다고 했다.
그러니 초속 50m 의 강풍은 어느 정도인가는 짐작이 갈만하다.
12월 19일 (목)
불안한 마음으로 바람소리에 신경을 쓰며 자는 듯 마는 듯 온밤을 지새웠다. 추워서 잔뜩 웅크린 자세가 그대로 굳어버린 듯 아침이 되니 온몸이 뻐근하다.
밖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여 텐트에서 얼굴만 내밀고 밖을 보니 이게 웬일인가 ?
뜻밖에도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다. 병풍처럼 둘러선 로체 능선위로 햇빛이 넘어오는 시간은 아침 9시 20분.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서서히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햇빛 구경을 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상황에 그것이 문제인가. 부랴부랴 출발을 서둘렀다. 오늘은 대원들이 C3까지 진출을 하고 내일 C4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셀파들은 중간에 데포시켜놓은 짐들을 싸우스콜까지 운반하기 위하여 내일 아침 일찍 C2를 출발해야 한다. 날씨가 좋아지니 전 캠프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오늘 C3까지 진출한 대원은 내일 아침 C4로 올라가고 모래 새벽 정상공격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C3로 올라가는 대원이 정상 공격조 이어야 한다.
급히 대원들의 컨디션 파악에 들어갔다. 대장을 제외한 6명의 대원중 가장 컨디션이 좋은 김종호, 홍성암, 박동석 대원을 출발 준비를 시키고 고소에 적응이 안 된 장경순과 고소증세로 C3에서 내려온 뒤에 회복이 안 된 김영대, 그리고 고소에 자신을 못 가진 박성우 대원은 자동적으로 1차 공격 조에서 제외되었다.
처음엔 1명의 대원과 앙리타를 정상공격조로 할 예정이었으나 시기적으로 한 번의 공격으로 승부를 걸어야하는 상황이고 세 명의 대원이 다 같이 체력이 좋아 한사람이라도 많은 수를 정상에 올리고자 계획을 수정하였다. 일본의 가모시카 팀도 4명의 대원이 셀파 없이 한꺼번에 올라간 기록이 있다.
출발 준비에 부산한 대원이나 준비를 도와주는 대원들이나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윽고 굳은 악수와 격려 속에 출발하는 대원들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베르그슈른트로 이어지는 대설원 속으로 멀어져 가는 대원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착잡하다.
부디 성공을 해다오. 그리고 무사히 내려와 다오. 간절한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밖에 오래 서있지 못하고 텐트 안에 들어와 가스버너를 켰다. 낮에도 불을 피우지 않으면 앉아 있기가 힘이 든다. 영하 30도는 그리 만만한 온도가 아니다.
무전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차에 공격조로 출발을 했던 홍성암 대원이 혼자서 되돌아 왔다. 깜짝 놀라서 웬일이냐고 물어보니 지난밤 기침이 심하여 약을 먹은 것이 몹시 괴로워서 도저히 더 못가겠다는 것이다.
“아뿔싸” 그동안 기침을 심하게 하였지만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는데 이 역시 고산증세의 한 징후였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사람이 낙오되고 말았다.
이윽고 C3에 도착한 김종호 부대장으로부터 도착 보고가 왔다. 아주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베이스에서는 남서벽 팀이 C1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이 왔다.
C1에는 우리의 빈 텐트가 2동 있는데 면적이 적은 캠프사이트에 그들이 텐트를 어떻게 쳤는지 궁금하다. 캠프 2지역에서 바로 올려다 보이는 남서벽의 시커먼 암벽이 새삼 눈길을 끈다.
12월 20일 (금)
아침 6시, 이른 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 셀파들로 C2는 가벼운 흥분의 물결이 인다. 사다인 앙리타와 3명의 셀파가 C2를 출발하여 싸우스콜까지 짐을 운반한 뒤 사다는 공격조 대원들과 정상공격을 위해 C4에 남고 나머지 셀파들은 C3를 거쳐 C2까지 되돌아 와야 한다.
밤새 무섭게 불어대던 바람이 새벽녘이 되니 조용해진다. 등정 성공을 위해 제발 내일까지만 바람이 불지 않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원했다.
이윽고 4명의 셀파는 출발을 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앙까미, 다와타망은 B. C 로 하산을 시켰다.
이제 C2엔 쿡과 키친보이외 셀파는 마일라타망 한사람 밖에 없다.
로체훼이스 중간에 설치한 C3를 지나 급사면을 횡단하는 점 4개가 보이고 11시 이들을 뒤쫓아 C3를 출발하는 김종호, 박동석 대원의 모습이 망원경에 잡힌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스콜까지는 진출해야 한다.
텐트 문을 열어놓고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설벽을 주시했다. 시야에서 대원들의 모습이 사라진 뒤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드디어 4시경 싸우스콜에 짐 수송을 마친 3명의 셀파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C4에 도착한 대원들과는 무전 연락이 안된다.
무전기를 오픈 시켜 놓은 채 도착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보니 짧은 해는 어느새 기울기 시작한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6시경 싸우스콜에 도착했다는 김종호 부대장의 목소리가 숨 가쁘게 들려온다.
“여기는 C4, 운행이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동석이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아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석이 와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아직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연락 바란다”
6시 반이 지나서야 동석이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마음이 놓인다. 올라가는 사람보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힘 드는 것 같다.
“수고 많았다. 지금 컨디션은 어떤가?”
“예 힘은 들지만 해볼 만합니다”
“알았다. 저녁을 먹고 내일 새벽 정상공격 준비에 잊어버린 것 없도록 만전을 기해주기 바란다”
드디어 싸우스콜의 김종호, 박동석과 앙리타가 내일 새벽의 공격시간에 맞추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베이스의 단장님과는 짝수시간마다 교신을 하며 상황을 보고 드렸다. 가장 걱정이 되는 날씨는 아직까지 별 이상이 없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싸우스콜과의 교신 문제다.
FM무전기의 경우 그 성능은 바다도 건너갈 만큼 강력하지만 산이 막히거나 계곡으로 떨어지는 지형적인 장애사항이 있을 경우엔 아주 치명적으로 약해져 버린다.
그 바람에 C2와 계곡 밑에 위치한 베이스와의 교신도 문제가 많고 완전히 보이지 않는 싸우스콜의 경우도 교신을 위해서는 싸우스콜 캠프사이트에서 50M정도 아래로 내려와야 하니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8천 미터의 싸우스콜은 기온이 영하 50도 가까이 떨어져 추위에 강한 특수 배터리도 한순간에 얼어버려 무전교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싸우스콜과는 무전 교신이 끊긴 채 B. C 와 교신하느라고 온밤을 꼬박 새웠다.
12월 21일 (토)
영하 30도로 떨어지는 텐트 안에 앉아서 밤을 새우기란 생각보다 힘이 든다.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놓은 채 무전기를 손에 들고 초조한 마음으로 베이스의 단장님과 교신을 한다.
“위에서는 무슨 소식이 없는가?”
“예 아직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예정대로라면 2시경 싸우스콜을 출발 했을 겁니다”
“날씨는 어떤가?”
“바람도 없고 날씨는 좋은 편입니다”
“ 런데 왜 연락이 없지?”
“글쎄 말입니다. 아마 지금쯤 열심히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답답한 마음에 서로가 다 아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온밤을 새웠다. 아침 7시 상황판을 보며 출발 시간과 현재의 고도를 짐작해 보니 공격조는 약 8,500M 지점에 있을 시간이다.
10시엔 남봉, 늦어도 1시엔 정상에 도착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은 없다. 베이스에 있는 정성근 기자는 등정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KBS본사에 알리기 위하여 배낭을 꾸려 놓은 채 카트만두까지 연락이 가능한 남체로 내려갈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자들뿐만 아니라 셀파들도 등정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고 오직 결과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홍성암 대원이 무전기를 들고 교신이 가능할 것 같은 설원 끝의 베르그슈른트 쪽으로 걸어가며 계속 공격조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9시경 홍성암 대원이 돌아와서 어이없는 소리를 한다.
“ 지금 종호와 동석이가 싸우스콜에 있답니다”
“ 뭐? 무슨 소리야?”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상황판단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워 진다. 지금 한참 올라가야할 친구들이 싸우스콜에 있다니 그러면 새벽에 출발을 안했다는 얘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암의 설명으로는 공격조가 예정대로 새벽에 출발을 했는데 가는 도중 너무나 추운 기온 때문에 산소마스크내의 습기가 얼어서 호스가 막히는 바람에 호흡을 못하고 애를 쓰다가 할 수 싸우스콜로 내려운 뒤에 지금까지 텐트에서 자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오! 하느님, 눈앞이 캄캄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린다.
베이스의 단장님에게 보고를 드리니 역시 기가 막힌 듯 말을 못 잇다가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라신다.
10시에 싸우스콜의 김종호 부대장과 교신을 했다. 공격조는 예정대로 새벽 2시 싸우스콜을 출발한 뒤 정상을 향해 올라 가던 중 영하 50도의 낮은 기온 때문에 호흡으로 인한 산소마스크안의 습기가 얼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산소 흡입 구멍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운행을 중지하고 응급조치를 하려고 애를 썼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더구나 추위에 헤드램프의 배터리마저 꺼져버려 8,300m 지점에서 할 수없이 하산을 했다는 보고다.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이럴 수가 있나?”
김종호 부대장이 사다는 오늘 B. C로 내려 보내고 자기와 박동석 대원은 내일 내려오겠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2차 공격조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1차 계획이 안됐으면 다음 계획으로 빨리 대처를 해야 하는 것이 대장의 역할이다.
대원들의 컨디션과 고소 적응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마땅한 방법이 없다. 그래도 김영대 대원이 가장 날 것 같아 김영대 대원과 새컨 사다인 앙리타를 불러 2차 정상 공격에 대한 협의를 한 뒤 내일 C3로 올라가도록 지시를 하고 장경순 대원도 C3까지 동행토록 했다. 장경순 대원에게는 C3에서 무전교신이 잘 안되는 싸우스콜과 C2간의 무전교신을 중계토록 했다.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한 김 부대장과는 저녁 6시에 다시 교신을 했다. 내일 새벽 다시 한 번 정상 공격을 시도해 보고 싶다는 내용이다. 내일 김영대 대원이 C3까지 올라가고 모래 C4까지 올라가서 다시 다음날 정상공격을 한다는 것은 날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상당히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인데 C4에 있는 대원들이 체력만 가능하다면 내일 다시 한 번 정상 공격을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믿었던 사다는 오늘 태연히 혼자 내려와 버렸고 지친 대원 둘이서 과연 가능한 일인지?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난다면 그것은 대장의 판단 착오이며 지친 대원만으로 셀파도 없이 사지로 올려 보냈다는 책임을 면키 어려운 일이다. 얼른 결심이 서지 않는다. 욕심 같아서는 백번 올라가라고 하고 싶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많다.
그러나 결국 고민 끝에 김종호 부대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내일 새벽 다시 한 번 정상공격을 하기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김종호 부대장에게는 어제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당부를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12월 22일 (일)
추위가 조금이라도 덜하고 날씨가 밝은 시간을 택하여 어제 보다 늦은 아침 7시에 김종호, 박동석대원은 싸우스콜을 출발 했다. 일찍 올라가봐야 어제처럼 산소마스크가 또 얼어버릴 것이 뻔하고 어둠속에서 위험한 등반을 하는 것 보다는 밝을 때가 낮겠다는 궁여지책으로 아예 산소를 쓰지 않고 무산소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영하 50도라는 기온은 얼른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물론 소련 어딘가는 겨울이면 50도가 쉽게 내려간다고 하지만 평지와 8천 미터의 고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얘기다.
산소가 평지의 1/3도 되지 않는 8천대의 높은 고도는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지역이다. 겨우 6천대에서 죽을 고생을 한 터이라 그 어려움을 가슴 절실하게 느낄 수가 있다.
8천 미터 지역에서는 운행 중에 사진 촬영을 한다거나 무전교신을 하기는 정말 끔찍이도 어려운 일이다. 기록용으로 가지고간 KBS의 수동식 소형카메라는 휠림이 얼어서 촬영이 불가능하였고 무전기 역시 알카배터리가 얼어버려 한두 번 호출 버튼을 누르다 보면 끝나버린다.
산소가 희박한 고소에서는 사고력이나 동작이 평지에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추위에 대비해 중무장을 한 터이라 몸은 둔하며 싸우스콜에서 남봉 까지는 경사가 급하여 제자리에 서있을 때에도 피켈과 아이젠에 의지하여 불안한 자세로 서있어야 한다.
봄가을 시즌에는 정상 공격 시에 눈이 허리까지 쌓여 러셀을 하느라고 애를 먹는 곳인데 동계에는 바위가 노출될 정도로 바람에 눈이 다 날아가 버려 아이젠이 박히지가 않아 팔자로 발을 벌려 걷거나 사이드 스텝으로 올라가야하고 쉴 때는 픽켈을 바닥에 찍은 채 피켈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휴식을 취해야 하니 그 불안함이야 오죽하겠는가?
지난 가을 바로 이곳 싸우스콜에서 정상 공격에 실패를 하고 돌아온 5명의 인도육군 등반대 대원들이 폭설로 인해 싸우스콜의 텐트가 망가지는 바람에 동사를 하고 말았던 그 지역의 많은 눈들이 지금은 바람에 다 날아가고 바위가 노출될 정도가 되었으니 그동안 바람이 얼마나 많이 불었는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산소마스크도 없이 사력을 다해 올라가는 김종호 부대장은 잠시 쉴 때 마다 몰려오는 졸음을 쫒느라고 애를 먹었고 앞선 김종호 부대장을 무의식적으로 좇아가는 박동석대원도 꼭 올라가야 한다는 의지하나로 버티기는 하지만 너무나 힘이 들어 시간이 지날수록 남봉을 향해 올라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기만 하였다.
로체연봉 너머로 보이기 시작하는 쿰부지역의 고봉들, 베이스에서 바라볼 때는 눈앞에 우뚝해 보이던 푸모리 봉도 이제는 저 밑 발아 보이고 있지만 역시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캠프사이트를 출발한지 8시간, 그동안 먹은 것도 없고 편안이 앉아서 쉬지도 못했다. 아침 출발시간도 늦었지만 진행속도도 너무 느리다. 어차피 출발부터 무리가 있었다.
77에베레스트 팀의 C5 지점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인데 우리 팀은 그시간에 아직 도착도 못했으니 시간상 정상을 갔다 오기에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
상황 판단은 빨리해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정상을 못 올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하산 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가 있다.
가지고간 불란서 제 산소 두통과 휙스 로프를 8,500M 지점에 남겨 놓은 채 서둘러 하산을 시작하였다.
하산 시에 실족을 하면 싸우스콜까지 5-6백 미터를 그대로 굴러 떨어져야 한다.
어려운 가운데도 기록사진은 찍어야 한다. 정상 사진은 아니지만 최고 도달 지점의 사진은 남겨야 한다. 등정에 성공을 하고 서도 증명이 될 사진 한 장이 없어서 등정여부 시비에 휘말리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어렵게 찍는 이 사진이 정상 사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사이 베이스와 C2에서는 피가 마르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침 출발부터 교신이 안 된다. 목이 터지게 공격조를 불러보지만 종내 무소식이다.
분명히 체력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을 했으니 위험부담은 첫 번째보다 훨씬 클 것은 틀림이 없는데 지금쯤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침 일찍 다음 공격을 대비하여 김영대, 장경순 대원을 C3로 출발을 시켰다.
다음은 C3로 진출하는 날의 장경순 대원의 기록이다.
정상 재공격 예정일, C4 물자 수송에 나섰던 니마옹추는 지원조로 C4에 남았다.
아침에 공격조가 출발을 했을까? 여전히 무전기는 불통이다. 영대와 나는 3차 공격을 위해 10시 30분 C3를 향해 C2출발했다. 영대는 걸음걸이가 무척 빠르다. 나 역시 보조를 맞추려 노력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푸모리 쪽의 파노라마가 일품이다. 지루한 설원지대를 지난 뒤 로체붸이스에 붙었다.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점차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얼마나 더 갈수가 있을까?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위를 올려다보니 영대는 벌써 저만치 위에서 유마를 두 손으로 잡고 매달려 올라가고 있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 10M를 계속해서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지난번 성우와 함께 왔다가 돌아간 곳까지 왔다. 배낭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로체 훼이스에 서서히 그늘이지기 시작한다.
저 아래 프모리 쪽은 아직도 햇살이 반짝이고 있다. 그늘이 지자 금방 추워진다. 몰려오는 추위에 쫓겨 급히 배낭을 지고 일어섰다. 시간은 3시 20분. 앞으로 남은 거리는 300여 미터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까마득하다. 그늘이 지며 엄습해오는 추위와 함께 몸이 서서히 탈진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C3를 약 100M정도 남겨 놓고 약간 가파른 빙벽을 올라갈 때 갑자기 더욱 심한 추위를 느꼈다. 이와 함께 손끝이 얼어들고 발가락이 몹시 시려웠다.
움직임이 활발하지 못해 그런 것 같아 좀 더 빨리 움직이려고 노력했으나 마음뿐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로체능선에 가려 더 이상 햇빛을 볼수가 없다. 강한 바람에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다운자켓을 서둘러 꺼내 끼어 입고 다운미튼도 털장갑위에 끼었지만 추운 기운은 가시지 않고 계속 떨리기만 한다.
너무나 춥다.
옆의 설사 면은 약 60도로 1000미터가 넘게 끔찍하게 서있고 외로이 휙스로프에 매달려 떨고 있자니 감당할 수가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본능적으로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먼저 올라간 영대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는 지금 물을 끓이는 등 캠프정리에 바쁠 것이다.
비틀거리며 C3에 도착을 한 뒤 텐트 안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아이젠을 벗을 기운도 없다. 영대가 뜨거운 물을 준다. 물을 마시고 누워 있는데도 몸이 계속 사시나무 떨 듯 떨린다. 침낭을 펴고 누워있는데 영대가 아이젠을 끌러준다.
신발도 못 벗은 채 누워서 계속 뜨거운 물만 마셨다.
장경순 대원의 일기에도 있듯이 C3까지 가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C3의 고도가 7,400M이니 웬만한 봉우리의 정상 높이이다. 그러나 에베레스트에서는 아직 초입일 뿐이다.
공격조로부터는 해가 기울도록 소식이 없다. 애가타서 베이스의 단장님과 계속 교신만 할뿐이다. 불안한 마음이 점점 심해진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해는 완전히 지고 주위가 깜깜해지니 온갖 불길한 생각에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다.
김종호 부대장은 이달 중 첫 아기 아빠가 될 몸이고 동석이는 재학생으로서 우리 팀 막내로 아직 장가도 못간 녀석인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노라니 더욱 미칠 것만 같다.
“정상 공격이고 뭐고 제발 무사하게 내려와만 다고 ”
불안한 마음은 어느새 간절한 기도가 된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기온은 사정없이 내려간다.
C3에 올라간 장경순 대원은 쉬지 않고 공격조를 불러댄다.
“여기는 호랑이 셋, 공격조 나와라. 여기는 호랑이 셋 공격조 나와라”
그러나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뿐. 무전기에서 들리는 장경순 대원의 다급한 목소리는 비명에 가깝다.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 저녁 7시 오밤중 같이 깜깜한 때에 마침내 소식이 왔다.
“여기는 공격조, C3 나와라”
“여기는 C3, 종호 형 별일 없어요?”
너무 반가워서 C3의 장경순 대원은 울먹인다.
C3에 내려온 김 부대장과 교신을 했다.
“대장님 미안합니다. 결국 못 올라갔습니다 ”
“아니야 괜찮아. 수고했다. 아무 일 없이 내려왔으면 됐어. 동석이도 별일 없지?”
긴장이 일순간에 풀어진다.
“아! 무사했구나 ”
공격조의 귀환으로 안심하는 것도 잠깐.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뒤 다시 C3의 김영대 대원의 정상 공격 계획에 들어갔다. 내일 싸우스콜로 진출한 뒤 모래 새벽 정상공격을 위한 세부 준비사항 체크에 들어갔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김영대 대원에게 희망을 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그런데 같이 동행할 사다가 골치 아프게 한다.
셀파중에 정상을 갈수 있는 사람은 사다인 앙리타 밖에 없는데 내일 싸우스콜로 올라가서 모래 김영대 대원과 같이 정상 공격을 해야 하는데 자기는 못 하겠다고 발뺌을 한다.
어제 김영대 대원이 C3로 올라가기 전 같이 계획을 세웠었는데 하루 만에 또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사다는 셀파들의 대장이다. 사다는 셀파들의 지휘는 물론 등반 성공을 위해 앞장서서 솔선수범해야 할 사람인데 셀파들에게 영향력도 별로 행사를 하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몸만 사린다.
화가 나는 것을 참고 저녁 식사 후 식당 텐트에 셀파들을 전부 집합 시켰다. 내일 아침 출발할 사람을 밤늦게 까지 설득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당신은 정상을 무산소로 세 번이나 올라간 사람이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셀파들 중 당신이 제일 강하고 겨울에 정상을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는 줄 알고 있다. 당신은 우리를 정상에 안내하기 위하여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안가겠다고 하는가? "
잘 통하지도 않는 말로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그를 설득하려니 어지간히 힘이든다.
“이번에 우리가 성공을 하면 모든 셀파들에게 많은 보너스를 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당신이 올라가지 않으면 다른 셀파들도 보너스를 받지 못한다. 여기 있는 다른 셀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근히 다른 셀파들의 측면 지원을 노리며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니 순진한 셀파들은 모두 사다가 올라가는 것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그런데도 본인은 막무가내다. 화를 참으며 다시 사다에게 안가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사다의 대답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의 얘기로는 우리가 수송용으로 가지고온 플라스틱 통이 가지고 싶어서 대원에게 하나만 달 라고 했는데 주지를 않아서 기분이 나빠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하고 어리둥절했는데 재차 확인을 한 뒤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올라가지 않겠다는 변명치고는 너무나 궁색한 변명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통을 틀림없이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 올라가겠다는 승낙을 겨우 받았다.
까미체링 왈 저 친구는 아주 스톤헤드(돌대가리)라고 흉을 본다. 성공을 하면 그래 그까짓 통이 문제냐는 것이다.
그러나 절박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후에 그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는 봄, 가을 시즌에는 정상을 그것도 무산소로 3번이나 올라갔고 지금도 자신이 있지만 이런 겨울에는 무서워서 못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너무나 춥고 바람이 너무 강해 겁이 난다는 것이다. 못 올라간다는 핑계를 댄다는 것이 급한 김에 통 얘기가 나온 것이다. 돈벌이를 위해 원정대에 참가는 했지만 목숨까지 버리고 싶지 않다는 그의 절박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너무나 내가 이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월23일(월)
싸우스콜의 김종호, 박동석 대원은 C3를 거쳐 C2로 하산을 하고 엇갈려 C3의 김영대 대원은 C4로 진출을 하였다.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사다도 C3를 거쳐 싸우스콜에서 김영대 대원과 합류를 하였고 위 캠프의 부족한 물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겔젠과 핀조 셀파가 사다와 같이 출발하였으나 핀조는 고산증세로 도중에서 돌아오고 말았다. 셀파들도 고산증세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기 시작한다. 그사이 좋았던 날씨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하다.
3시경 김종호, 박동석 두 대원이 C2에 도착을 하였다.
“대장님 미안 합니다 ”
텐트 밖의 인기척에 자크를 열고 내다보니 시커멓게 탄 김부대장이 있다. 나도 모르게 끌어안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 일 없이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는가?
베이스의 단장님에게 공격조의 C2 귀환을 보고 드리고 내일 김영대 대원의 마지막 공격에 대해 상의를 드렸다.
그런데 밤이 되면서 점차 날씨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바람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상황 체크에 부산하다. 싸우스콜로 부터의 소식도 점차 비관적이다.
“여기는 공격조. 지금 싸우스콜은 바람이 엄청납니다. 텐트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 내일 새벽의 공격은 어떻겠는가?”
“ 지금 상황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내일 공격이 문제가 아니라 C4 자체도 위험합니다. 계속 기다려 보겠습니다 ”
C3에 혼자 남아있던 장경순 대원의 무전 중계로 싸우스콜과의 교신이 어느 정도 쉬워 졌다.
C4로부터 바람이 조용해지면 오늘밤 11경 정상 공격 출발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11시,1시, 2시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오히려 점점 세어지기만 한다.
“광풍" 이건 정말로 미친바람이다.
이를 갈며 가슴을 태우며 온밤을 꼬박 새웠다.
12월 24일 (화)
크리스마스이브에 멋지게 해치우자던 계획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새벽녘이 되며 강풍은 눈보라를 동반한 폭풍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눈이 오는 것인지 마지막 남은 눈을 아예 쓸어버리려는 것인지 온천지는 눈으로 가득차서 정신이 없다.
김영대 대원이 겁먹은 목소리로
“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어 온다.
“뭘 어떻게 해. 내려와야지 ”
하산을 명령하며 내 자신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도 없이 이대로 끝나고 마는가?
이번 등반을 준비하며 사업까지 젖혀두고 매달렸던 지난 일들이 다시금 생각난다. 이번에 참가한 모든 대원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등반을 책임져야하는 나의 입장은 또한 다르다.
원정 경비의 결정적인 후원업체 KBS의 지원문제가 풀리지 않아 원정 자체가 무산될 지경에 처해져 다급해진 내가 일본에서 학위 준비 중인 김상겸 단장님께 전화를 하였다.
“이번 원정 준비에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모두들 나 몰라라 하는데 형님이 오셔서 해결해 주지 않으면 저도 그만 두겠습니다.”
볼 메인 나의 전화 한마디에 김상겸 단장님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다음날 귀국을 하셨다. 그리고 총장님, KBS 사장을 만나 지원금을 받아내어 이번 원정대가 출발 할 수 있도록 애를 쓰신 김상겸 단장님, 그리고 우리 원정대를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모든 분들에게 무엇이라고 변명을 할 것인가.
“날씨가 나빠서?” 아니면
“추위 때문에?” 모든 것은 구차한 변명 밖에 안 된다.
우리가 출발하기 전 일각에서는
“유명산악인도 없고 히말라야 원정경험도 별로 없는 팀이 동계등반을 어떻게 하겠다고”
라는 비웃는 얘기도 들었다.
그들의 말처럼 정말 우리는 능력도 없으면서 의욕만 가지고 덤벼든 것은 아니었는가? “
그러나 우리는 7명의 대원으로 최선을 다한 것만은 사실이다. 단장님과 대장을 제외한 6명의 대원이 훌가동 되어 C3이상까지 모두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가 일단은 뒷수습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오랜 고소체류로 지친 김종호, 박동석 대원은 B. C 로 하산 시키고 C4의 김영대 대원과 C3의 장경순 대원은 C2로 하산토록 했다.
그러나 C2에서 베이스로 하산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지만 C4에서 C2로의 하산은 이런 날씨에 보통 문제가 아니다.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시야는 10M터도 안 된다. 자칫하면 C4에 고립될 위기에 처한 김영대 대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C4를 출발했다. 싸우스콜에서 잘못해서 실족을 하면 1,500미터 아래의 설원지대까지 거칠 것 없이 그대로 구르고 만다. 지난 가을 싸우스콜에서 조난당한 5명의 인도팀 사망자들도 시신을 굴렸더니 바로 이곳 설원지대까지 떨어졌다고 하지 않은가?
그대로 앉아서 죽느냐 움직이다 죽을 것이냐 라는 절박한 순간에 필사적인 탈출은 시작 되었다.
휙스로프에 매달려 천신만고 끝에 C3까지 온 김영대 대원은 C3의 장경순 대원과 같이 다시 C3로 하산을 서둘렀다. C3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텐트를 칠 자리가 마땅치 않아 급경사 설면을 깎아서 간신히 2동의 텐트를 쳐 놓았기 때문에 이런 날씨엔 자칫하면 텐트자체가 공중으로 날아갈 염려가 많다.
악전고투 끝에 두 대원과 사다가 C2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 필사의 탈출은 무사히 성공을 하였다.
정상 등정에 실패를 하고 사람까지 다친다면 이처럼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 일 없이 모두 하산 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12월 25일 (수)
오늘은 만인이 축복을 받는다는 크리스마스다. 그러나 지난밤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수은주는 텐트안의 온도계가 영하 30도를 가리킨다.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우모복을 아래위로 끼어 입고 우모버선에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빈 배낭과 남은 옷가지를 몽땅 침낭 위에 올려놓은 채 잠을 청했으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잠을 잘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이런 추위가 싸우스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사람의 적응 능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하다. 이곳의 온도 영하 3, 40도는 성능을 자랑하는 신형냉장고의 급 냉실 온도다. 만약 급 냉실 냉장고 속에 들어가 한 달만 있으라고 하면 아마 너 죽고 나 살자고 난리가 날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추운 것이 편리할 때도 있다. 주스 파우더를 물에 타서 텐트밖에 내놓으면 잠시 후에 아이스크림이 되니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
텐트 바로 윗부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팬텀기의 음속돌파 소리 같다. 저곳에 서있다가는 바람에 날리는 종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쳤다. 모두들 분위기가 쳐지는 것이 패잔병들이 모인 분위기이다. 전 대원에게 베이스로의 철수를 지시했다. 악화되는 날씨에 6,400M의 고소에서 장기 체류를 한다는 것은 제살 깎아먹는 일 밖에 안 된다.
혼자서 고민을 하였다.
동계등반의 기한이 2월 15일 까지 인데 지금 이대로 전원이 철수를 하면 이번 등반은 아주 끝장이다. 그래도 끝까지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진 베이스캠프인 C2에서 나까지 철수하면 다시 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나 혼자라도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C2에 혼자 남겠다고 하니 모두들 내 눈치를 본다. 키친보이까지 전부 내려가라고 하니 난감해 진 것이다.
이곳에 대장 혼자 남겨 놓고 내려가자니 갈수도 없고 안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재학생 막내인 박성우 대원이 자청해서 남겠다고 자원을 한다. 베이스에 얼마나 내려가고 싶겠는가? 하는 말이 기특하다.
“대장님 혼자 어떻게 계십니까? 제가 남아서 식사라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너도 올라온지 오래 됐으니 내려가서 쉬어”
“싫습니다. 저도 남겠습니다”
무슨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결국 두 사람만 남겨놓고 하산하는 대원들과 셀파들의 발걸음은 무겁기 만하다. 셀파 중 앙도루지는 설사로 고생을 하는 바람에 체력이 다해서 다른 셀파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하산을 하였다.
하산 중 아이스폴의 상태는 올라올 때보다 형편없이 망가져 설치해 놓은 휙스로프가 크레파스 속으로 묻혀버리는 등 말이 아니다.
단장님과 기자들, 베이스에 있던 셀파들의 마중을 받으며 베이스에 도착한 대원들은 무엇보다도 영하 15도의 온화한 기온(?)에 마음부터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8천대, 7천대, 6천대, 5천대 이렇게 각 1000미터 단위의 차이는 온도뿐만 아니라 산소의 차이가 많이 나서 그 느낌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고소증세로 거의 실신상태에 있던 사람을 아래로 운반해 놓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해 진다.
처음 베이스에 도착을 한 뒤 돌밭위에 텐트를 설치할 때 황량한 주위 환경이 너무나 쓸쓸하여 하루도 못 있을 것 같던 곳이 위에 있다가 내려오면 이렇게 낙원같이 느껴지는 것은 참으로 희한안 일이다.
북적대던 C2의 텐트촌이 썰물 빠지듯 대원들이 모두 하산하고 나니 썰렁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없는 빈 텐트들 가운데 남아있는 두 사람은 절해의 고도에 내 팽개쳐진 느낌이 들었다.
한 동의 폴라텐트와 6동의 3인용 텐트는 두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숫자이다. 대원들이 떠난 빈 텐트가 얼마나 쓸쓸해 보이는지 참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평생 잊지 못할 너무나 쓸쓸한 크리스마스이다
오후부터 또다시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쩐지 바람의 느낌이 심상치 않다.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가하고 애써 편안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서 더욱 위력이 강해진다.
난방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EPI가스가 거의 바닥이 나서 베이스에 일단 공급 요청을 해 놓았지만 이런 날씨에 짐 수송이 될지 걱정이 된다. 가스가 떨어지면 이런 추위 속에 계속 버티기가 힘들 것 같다
밤이 되면서 상황이 심각하게 변한다.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도의 바람이 엄청난 힘으로 몰아친다.
찢어질듯 휘어져 들어오는 텐트를 안에서 손으로 등으로 번갈 밀면서 온밤을 꼬박 새웠다.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이 잠이라도 자다가는 텐트가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아 잠을 잘 수가 없다.
식당 옆 다른 텐트에 혼자 있는 박성우대원도 기척이 없는데 나가서 확인할 여유도 없다. 밖으로 나가려고 자크를 열었다가는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텐트가 풍선처럼 부풀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문 열기가 겁난다.
12월 26일 (목)
아침이 되어도 바람은 여전하다. 오히려 강도가 더 세어지는 것 같다. 아침은 먹을 생각도 못하고 계속 바람과의 씨름이다. 그나마 이런 바람에도 용케 버텨 주는 우리의 텐트가 참으로 대견스럽다.
거북이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 한 모양의 우리 텐트는 이번에 크게 한 몫을 한다. 부디 끝까지 버텨다오. 오직 믿을 것은 텐트 밖에 없다.
날이 밝은 뒤 고개만 내밀고 밖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아직 날아간 텐트는 없는 것 같다. 바람으로 자크가 열린 텐트가 바람을 가득 채우고 공처럼 부풀어서 금방이라도 나라갈 듯하고 열린 문은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다.
완전 무장을 한 뒤 텐트 밖으로 나왔으나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텐트들을 챙기고 나니 정신이 없다. 문이 열린 텐트 안에는 눈이 가득 차 있다.
기온은 역시 영하 30도. 바람에 의한 체감온도를 계산하면 과연 몇 도나 될까? 낮에도 햇빛이 나지 않으니 기온은 오르지를 않는다. 이제 남은 가스는 2개뿐 오늘 저녁이면 끝이다.
식사는 할 생각도 못한 채 바람 소리를 귀가 멍하도록 들어가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 5시. 놀랍게도 니마도루지가 가스 한 박스를 지고 올라 왔다. 너무나 뜻밖이라 놀래고 있는데 베이스 지역은 이곳처럼 바람이 요란하지 않아 단장님의 명령으로 출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C1을 지나면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도 가도 못하다가 할 수없이 죽을 각오를 하고 C2 까지 온 것이다. 사색이 된 니마도루지를 텐트 안에 들어가서 쉬도록 했다.
아무튼 C2에서 대장이 얼어 죽지 않도록 배려해 주신 단장님이 더더욱 고마울 뿐이다.
12월 27일 (금)
어젯밤도 역시 잠을 자지 못했다. 무슨 바람이 어떻게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불어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이틀 전 C2에 올라와 우리 텐트 근처에 텐트를 쳐 놓고 있던 남서벽 원정대 대원은 그 팀이 사용하던 텐트가 박살나는 바람에 도움을 청해 비어있는 우리 텐트를 사용토록 했다. 만약 그 팀 혼자 있었다가 텐트가 무너졌으면 어쩔 뻔했는지 자못 걱정스럽다.
그들이 가지고온 텐트는 코롱에서 제작한 텐트인데 고소용이 아닌 일반 텐트로서 이런 바람에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제 가스를 지고 올라온 니마도루지는 하룻밤을 자고 나더니 겁에 질려 베이스로 내려가겠다고 한다.
이런 날 혼자 가다가는 크레파스에 빠지면 시체도 못 찾으니 날씨가 좋아지면 내려가라고 말렸다. 식당텐트에 들어가 보니 폴라텐트가 미친 듯이 펄럭이고 천은 땅에 닿을 듯 축 늘어져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 그 안에 남서벽팀 대원이 죽은 듯이 누워 있다. 이곳은 위험하니 작은 텐트에 들어가 있으라고 권하니 모기만한 소리로 괜찮다고 하며 꼼짝을 안한다.
추위와 공포감을 이겨내기가 힘이 드는 것 같다. 힘을 내라고 위로하는 내말이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바람은 저녁이 되어도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오히려 어둠과 가세하여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는 것 같다.
공포의 밤은 또다시 시작이 되고 있었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는지 자신이 안 선다. 만약 텐트들이 날아가 버린다면 결국 바람 속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버리고 이 추위에 꼼짝없이 얼어 죽고 말것이 아닌가?
문득 말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집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난다. 녹음기를 꺼내놓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녹음했다. 만일 내가 이곳에서 얼어 죽으면 이 테이프는 우리 가족들에게 전달 되겠지.
일단 마음의 정리를 하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진다.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 일단은 마음이 편안해지고 불안이 없어진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얼어 죽은 뒤에 우리 대원들이 올라와서 볼 때 나는 의연한 자세, 편안한 얼굴 표정이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또 하루 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12월 28일 (토)
아침이 되면서 어느 정도 바람의 기세가 약해지는 듯하다. 그러면 그렇지 일 년 열두 달 바람만 불수야 있나. 밖에 나가 텐트들을 둘러보며 어지러운 것들을 대충 정리를 하였다.
막내 성우와 셀파도 텐트에서 나와 새 세상을 보는 듯 감격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핀다. 세상에 바람 바람 하지만 참으로 기가 막힌 바람을 경험하였다.
그 동안 식량 공급이 되지 않는 바람에 먹을 것이 없어 베이스에 지원 요청을 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출발을 했다는 셀파들이 저녁때가 되어도 도착을 하지 않는다. 뒤 늦게 아이스폴이 무너져 겨우 C1까지 와서 자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날씨가 조금 좋아지자 남서벽팀 대원이 부랴부랴 내려갈 준비를 한다. 그동안 텐트가 망가져 우리 텐트에 신세를 지고 있던 터라 빨리 내려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출발준비를 한 뒤 일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 만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무릎에 힘이 없어서 일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 일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역시 주저앉고 만다.
사람이 강한 쇼크를 받으면 무릎에 힘이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데 그동안 추위와 극도의 공포감으로 쇼크를 받은 것 같다. 하산을 만류하고 하루 더 쉬도록 했다.
하루 사이지만 어제와 오늘은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의 차이만큼이나 분위기가 다르다. 날씨가 좋으니 이렇게 모여서 얘기도 할 수 있고 사람 사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바람소리가 시끄럽지 않아서 좋다.
12월 29일 (일)
어제 C1까지 올라왔던 셀파들이 식량을 지고 11경 올라왔다. 점심 식사 후 니마도루지도 이들과 같이 베이스로 내려 보냈다.
남서벽 팀 대원은 오늘도 역시 운행이 불가능하다. 지원 차 올라온 두 명의 셀파가 옆에서 부축을 해 주는 데도 서 있지를 못한다.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정말 몰랐다. 그 친구는 남서벽 팀에서 가장 체력이 좋아 제일 먼저 올라온 대원인데 일어서지도 못하니 이해가 안 된다.
밑에서는 무전으로 계속 정신력으로 버티고 내려오라고 재촉이다. 옆에서 거들던 셀파들은 갈 수도 안 갈수도 없어 어쩔 줄을 모른다. 옆에서 보다 못한 내가 무전으로 이쪽 상황을 설명을 하고 들 것을 만들어 올려 보내라고 조언을 한 뒤 하루 더 쉬도록 했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그 험한 곳을 내려갈 생각에 걱정을 하던 셀파들은 안심을 한 듯 좋아 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12월 30일 (월)
밤새 또 바람이 분다. 오늘은 그 동안 베이스에서 쉬고 있던 대원들과 셀파들이 올라오는 날인데 이런 바람 속에 과연 운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된다.
오후가 되면서 다행히 바람이 조용해진다. 남서벽팀 대원은 지원 하러 올라온 또한 명의 셀파가 빈손으로 올라와서 할 수 없이 매트레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엉거주춤 한 상태로 앉은 채 세 명의 셀파가 끌고 내려갔다. 저렇게 하고 아이스폴을 지나 베이스까지 내려 갈 수가 있을까 참으로 걱정이 된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바로 에베레스트정상 부근이다. 너무나 가까이 있는 정상, 그러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정상이다.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흰 구름이 소용 도리 치는 모습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오후에 김종호, 장경순, 박동석 대원과 셀파 3명, 그리고 키친보이가 올라 왔다. 오래간 만에 사람들이 북적대니 기분이 좋다.
사람은 역시 사람 속에서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12월 31일 (화)
오늘은 85년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지난번 공격 때에 성공을 했더라면 지금쯤 신나게 하산준비를 하느라고 바쁠 터인데 이제 또다시 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조용히 받아드리는 수밖에 없다.
오후엔 사다인 앙리타가 올라와 인사를 한다. 화를 낼수도 없고 웃는 얼굴을 할 수도 없어 보기가 괴롭다.
지금쯤 한국에서는 망년회다 송년회다 하면서 한창 바쁠 때인데 이 깊은 산속 텐트 안에서 꼼짝 못하고 앉아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하니 마음만 답답하다.
오래간 만에 김종호, 장경순 대원과 늦도록 얘기를 나누며 너무나 추운 한해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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