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력은 믿을 것이 못 되어 세월이 지나면 잊어버리거나 잘못 기억하기가 쉽다.
그런데 나는 아쉽게도 2000년 이전의 옛날 사진이나 기록 등을 저장했던 PC에서 여러 자료들이 대부분 사라져 버려 그때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의 확실성에 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리를 해본다.
나는 1994년에 (사) 대한산악연맹 임원으로 있으면서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했는데 그중 잊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국제설악산악마라톤대회”다. 이제 세월이 더 가기 전에 정리를 해본다
1994년 9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설악산에서 “94 국제 설악산악마라톤대회”가 열렸다.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하고 대한산악연맹이 주관하는 국제행사다. 지금이야 큰 행사를 많이 하고 있어 이런 정도의 행사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노트북이나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야외에서 더구나 산에서 하는 행사를 하며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1986년 11월부터 1995년 3월까지 서울시산악연맹의 기획이사를 하는 중에 1993년 도봉산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악마라톤 대회를 치루었는데 당시 전국 산악단체의 관계자들이 처음 하는 대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관을 오고 또 선수를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첫 행사인데도 대과 없이 무난하게 대회를 치렀는데 그 영향인지 1995년 9월에 한국방문의 해 기념행사로 관광공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으로 설악산에서 국제 산악마라톤대회를 계획하고 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용을 모르고 있었고 당시 사업적인 어려움으로 남모르는 고생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1994년 임철순 회장이 대산련 회장으로 재선출된 후 진행하던 마라톤대회의 준비 상황이 여의치 않자 당시 대산련의 고영철 부회장과 김장선 사무국장이 나를 찾아와서 대산련 임원으로 와서 산악마라톤대회 준비를 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시연맹 이사의 사임도 고민을 하던 중이라 그럴 여유가 없다고 극구 사양을 하였는데 상황이 급한 대산련에서는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며 두번이나 찾아와 간곡하게 요청을 해서 결국 나는 대산련 임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기획이사뿐만 아니고 총무이사와 전무이사도 공석이라 결국 내부 일을 전부 떠맡으면서 국제마라톤대회 행사 준비도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바람에 나는 시연맹 김 회장님으로부터는 시 연맹을 버리고 간 배반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대산련에 나가기 시작한 때는 이미 4월이 지나가고 있어 9월의 행사 날자까지 준비 기간이 얼나 남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모든 책임을 내가 뒤집어쓰게 생겼다.
나는 우선 서울시연맹 때 산악마라톤대회를 운영해본 것을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중요한 일, 시간적으로 빨리할 일들과 세부 일정을 짜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그동안의 준비 상황을 검토해 보니 가장 중요한 대회 코스가 목우재–달마봉-신흥사-설악동으로 결정되어 있어 코스의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급히 관광공사 행사 담당자인 김 과장과 대산련 임원들 몇 명이서 현장 코스 답사를 해 보니 기존 코스가 국제대회를 하기에는 적합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 과감하게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하고 9월 대회 날자에 맞추기 위한 코스 선정에 들어갔다.
먼저 백담사-오세암 –설악동 코스와 오색–대청봉–양폭산장–설악동의 두 개 코스를 예정하고 답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답사를 갈 멤버가 마땅치를 않아 나는 설악산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마운락 설악산 구조대 대장에게 연락을 해서 먼저 백담사- 마등령 코스를 둘이서 답사해 보기로 했다.
약속한 날에 백담사 입구에 가보니 마대장이 배낭도 없이 빈몸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설악산 구조대장이 설마 그런 복장으로 갈 것인가 의아해하고 있는 나에게 그 친구는 “자, 출발하시지요” 한다.
기가 막힌 나는 화도 못 내고 가지 말자고 할 수도 없어 고무신 신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마대장 뒤를 따라가는데 마대장은 고무신을 신고 험한 산길을 잘도 올라간다. 나는 뒤에서 이 친구가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소문대로 기인인가 라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마지못해 뒤를 따라가다가 문득 한편 이러다가 고무신이 미끄러져 넘어져 사고라도 나면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구조 요청도 못하고 이 등치를 혼자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전에 설악동에서 마대장이 권금성으로 올라가는 케불카를 보면서 “저 케이블카 줄을 손으로 잡고 권금성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하길래 “그거 말이냐 방귀냐” 하고 핀잔을 주던 생각이 나면서 역시 기인이 맞기는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30년 전의 일을 기억하다 보니 험한 산길을 반나절 넘어 설악동까지 가는 동안 내가 가지고간 물이나 간식을 마대장에게 나누어주었는지 아니면 나 혼자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얼마전에 지인에게 마대장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전에 생각했던 대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 역시 참으로 드라마틱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첫 답사 후 이어서 연맹 임원 몇 사람과 오색-대청봉-양폭 코스를 답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두 코스를 비교 검토한 결과 고민 끝에 오색-대청-양폭-설악동 코스로 결정을 하였다.
일을 진행하다 보니 모든 일을 나 혼자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상당한 부담이 된다.
결정을 혼자 했으면 그 책임도 나 혼자 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대회가 9월 12일로 확정이 되어 있어 팜플릿을 빨리 만들어 해외 홍보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한가하게 회의나 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다.
우리나라 산악인들은 처음 하는 국제산악 마라톤대회를 5개월 앞두고 대회 코스도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는 대산련을 주시를 하고 있는 상항이라 연맹이나 관광공사는 완전히 코너에 몰려서 내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니 고 부회장이 두 번이나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만하다.
그런데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다 보니 주위 산악인들의 눈총이 뜨겁고 말도 많다. 한국 산악계에 존재감이 없던 내가 갑자기 등장해서 처음하는 산악마라톤대회를 그것도 국제대회를 한다고 설쳐대고 있으니 도움은 안되면서 별 얘기들을 다 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애써 무시하면서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그런데 정작 코스를 정하고 나니 이제는 생각지도 않은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자연훼손을 이유로 설악산 산악마라톤 대회 개최를 강력하게 반대를 한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산에서 뛰면 설악산이 다 망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설악산 관리사무실 회의실에서 공단 관리소장, 이기섭 박사, 기자들, 환경단체 사람 등 여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찬반 논쟁을 했는데 관리공단에서는 설악산 탐방길이 망가진 여러 장의 사진들을 보여 주면서 대회 개최는 절대 불가하다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주장하고 환경단체들도 이에 동조하며 아우성을 친다.
그러고 보니 회의실에 참석한 사람들중 찬성을 주장하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그동안 당신들이 어떻게 관리를 해 왔기에 이 모양이 되었는가? 그에 대한 반성은 안 하고 아직 하지도 않은 마라톤대회에 탐방길 파손 책임을 전가하느냐고 맞서면서 국제산악마라톤대회를 하면 그동안 해온 당신들의 치부가 언론에 노출될까 봐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여러 사람을 상대로 맹열한 싸움을 하였다. 그당시 내 주장은 설악산 보호를 위해서는 매스컴을 타면서 그 필요성과 예산 확보를 위한 국민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획가 될수도 있지 않은가를 계속 설득하여 결국은 대회 유치 승인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그 사람들을 상대로 이겨냈는지 신기한 생각이 든다.
해외 홍보와 대회를 치르는 경비는 주최자인 관광공사에서 하고 주관사인 대한산악연맹은 대회 진행에 대한 준비에 전념한다. 그런데 연맹은 당시 상근 직원이 사무국장과 과장 그리고 여직원 두 명밖에 없고 임원들은 비상근인데 나는 매일 연맹에 출근을 하면서 일정표 체크 하면서 일을 추진하면서 필요한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에 가서 산악마라톤대회도 참관하였는데, 관광공사는 걱정이 되는지 나를 제주도에서 열리는 자기들이 주최하는 국제 트라이애슬론 대회를 참관하라고 초대를 한다.
일본에 가서 참관한 산악마라톤 대회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일찍 시작한 관계로 참고할 사항이 많았는데 20km, 70km 등 장거리 코스의 경우는 코스가 길어서 중간에 체크 포인트를 여러 군데 설치를 한다.
나는 열심히 경기 진행 내용을 기록하면서 우리 계획과 비교를 했는데 모든일은 앞서가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연구하면 나한테 많은 도움이 된다.
일본은 각 지방 산악연맹 지부에게 선정한 포인트를 지정해 주는데 70km의 경우엔 많은 인원을 투입해야 하고 산속에서 야영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인원 동원이 쉽지를 않다고 한다.
돌아온 뒤 나는 우리도 그 방법을 이번 대회에 적용을 하기로 한 뒤 각 지방연맹에 공문을 보냈는데 지방연맹들은 처음 하는 국제행사에 같이 참여의 기회를 공유하는 것에 대해 은근히 반기는 분위기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자가 임박해지면서 세부계획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설악산에는 설악산구조대가 열악한 환경 속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국제 산악마라톤대회에서 자기들이 당연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를 원하면서 그 역할에 대한 요구를 해온다. 그 얘기를 들은 고 부회장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의견을 묻는다.
나는 마 대장이 정도를 넘으면 행사에서 손을 떼라고 하세요라고 하니 다혈질의 고 부회장이 “야, 너희들 싫으면 그만둬”라고 호통을 치자 마대장은 당황을 하고 아무 소리를 못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일을 하면서 도움을 주기는 어려워도 훼방 놓기는 쉽다고 했는데 잘못하면 실무를 하는 내가 어려워진다.
안 되겠다 싶어 나중에 마 대장에게 전화를 해서 중간지점인 홍천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다
당일날 약속 장소에 가보니 마대장은 구조대원 여러 명과 같이 나와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블랙야크 강사장에게 부탁해서 받아온 구조대가 사용할 보조자일 묶음을 주면서 아무 소리 말고 같이 열심히 하자고 하니 멋쩍게 웃으며 수긍을 한다.
마대장 입장에서는 만약 설악산에서 하는 국제 행사에 설악산구조대가 제외되면 마대장이나 구조대 체면이 말이 아닌 상항이 되니 속으로는 답답해했던 것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된 고 부회장과 상남자 마 대장 생각이 난다.
한국관광공사는 1994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중, 외국인들이 좋아할 색다른 행사로 산악마라톤대회를 계획하였는데 외국인 선수가 300여 명, 한국인 선수 700명과 많은 응원단까지 몰려와 전날의 전야제 행사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덕분에 나는 전야제 국제행사의 사회를 보는 경험까지 하였다. 영어 사회는 관광공사 김 과장이, 한국말 사회는 내가 맡았다.
대회 당일 아침 오색 약수터 출발지에 모인 1,000명의 선수가 시간차로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도착 지점인 설악동 뉴설악호텔 앞 으로 가기 위해 차를 몰고 혼자서 급히 출발을 하였다. 설악동으로 가는 도중 KBS 라디오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자고 미리 시간 약속을 해서 이동 중에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곳에 들려 방송국에 전화를 걸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모든 일이 나한테 집중이 되는 것이 부담도 되고 왜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는가 라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가 전투할 때 적군과 직접 부딪치며 싸우는 것은 말단 중대의 각 소대 장병들이다.
그런데 국방부 지휘부가 전투 계획에서부터 소총 사격수 역할까지 다하려니 일도 안되고 효과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서울시 산악연맹에서 기획이사를 하면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악마라톤대회를 치렀는데 몇 번의 행사는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시 연맹의 임원과 구조대의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별 어려움 없이 행사할 수 있었지만, 대한산악연맹은 사무직원 몇 명뿐이고 이사나 임원들은 전부 지방에 거주해 모이기가 어려워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런 행사는 다음부터는 지방연맹에서 주관해서 하도록 하자고 건의하여 다음 해부터는 큰 행사 주관은 지방 연맹에서 시행을 했다..
그래서 전국산악구조대와 경찰구조대, 그리고 소방 헬기까지 동원하는 1박 2일의 구조대 시범 훈련등의 큰 틀은 내가 정하고 실행은 광주 연맹에 맡겨서 훈련을 선운사 암장에서 했던 기억도 난다.
설악산 산악마라톤대회는 다행히도 무난히 치러졌는데 전체적인 호응도가 좋았고 특히 외국인 참가 선수들은 설악산 정상을 경유하는 코스에서 주위에 보이는 바다와 설악산의 능선들이 어우러진 경관에 대해서 많은 찬사를 보냈다.
국제산악마라톤대회는 처음 시도한 지방연맹들이 참여한 중간 포인트 관리도 잘 되었고 기타 행사진행이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이 되어 한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핸드폰도 없어 서로 연락도 안 되는 가운데, 무전기 몇 대 가지고 어떻게 행사를 치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관광공사에서는 94년 한국방문의 해에 열었던 여러 행사에 대한 연말 평가를 했는데 그중 설악산악마라톤대회가 1등을 했다는 소식을 담당 과장이 전하면서 나한테 고맙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저는 대한산악연맹이 전국적인 규모의 큰 단체라 일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일하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라고 말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된다
사람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처음 오색온천~대청봉~양폭산장~뉴설악호텔까지의 19KM 코스를 확정하고 나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 코스를 일반인들이 하루에 주파하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설악산 구조대원들은 설악산이 자기들 앞마당이다. 그래서 가장 잘 뛰는 선수 한 명을 뽑아서 맹 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그 기록이 2시간 반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 마대장은 나를 보고도 입도 뻥끗 안 한다.
그런데 박우용 선수가 2시간 16분 55초를 마크하고 일등을 했다. 일본선수들도 우승을 장담하고 인솔 단장이 오색에서 출발 전에 몸풀기 에어로빅을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자 나보고 준비운동시간을 줄여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는데 결국 3등에도 입상을 못했다
이제 당시를 돌아보니 어느새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그때 같이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30년이란 세월은 신경을 써서 열심히 기록을 해놓지 않으면 많은 기억들이 사라져 가는 시간이다.
"검색을 해보니 당시 보도된 조선일보의 기사 내용이 있다." 박우용씨 남자부 패권 / 설악 국제산악 마라톤 조선일보 입력 1994.09.12 00:00 "설악산=임호영기자" 한국방문의 해 기념 94국제 설악마라톤대회에서 박우용(한국)이 남자부 패권을 차지했다. 11일 오전 10시 남설악산 오색온천을 출발, 설악폭포~대청봉(해발1천7백8m)~양폭산장~설악소공원~뉴설악호텔간 19㎞ 코스에서 벌어진 산악레이스에서 박우용은 2시간16분 55초를 마크, 국제 산악마라톤에서 처음 우승하는 감격을 누렸다. 김인수(한국)와 이동규(한국)는 2, 3위를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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