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병광 형님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 고대산악부에 입회하면서부터이니 병광 형님과 같이한 세월이 어느새 56년이나 되었다.
당시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산악부의 분위기에서 9년이나 선배인 병광 형님은 하나님 같은 존재였는데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형님은 동기들 중에서도 가까이하기가 제일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생각이 바뀐 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의 어느 해 가을날 북한산에서 재학생과 오비 합동 산행을 하던 때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이다. 병광 형님은 고대산악회 O B회 초대 회장으로 산행에 참석을 하시었는데, 단풍 막바지낙엽이 휘날리는 산자락에서 우리 일행 30여 명은 나무 밑에 둘러앉아 오붓한 모임의 자리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준비한 와인으로 잔을 채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마침 떨어지는 단풍잎이 병광 형님의 잔에 들어갔다. 옆에 앉았던 내가 얼른 그 낙엽을 건저 내려니 병광 형님이 내 손을 황급히 막으며 “이런 단풍잎은 건져 내는 게 아니야” 하시며 그 잔을 들고 그윽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시는 모습에 나는 병광 형님에 대한 인식이 확 바뀌었다.
“아니 병광 형님에게 이런 면이?
우리 산악부엔 54학번 병광 형님의 동기가 다섯 분이다. 모두 해병대를 제대하셨는데 당시 부잣집 도련님들인 이 다섯 분은 각자 개성이 강하고 와일드하여 고대 내에서는 주위에서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존재감이 확실한 분들이었다. 재미있는 일화로는 6.25 전쟁 중 휴전이 된 지 얼마 안 되는 1950년대 중반, 고대 내의 모든 시설들은 상당히 빈약하였는데 학생식당도 마찬가지여서 점심때는 식당 안에 앉을자리가 없어 자리 잡느라고 난리였다. 그런 와중에도 식탁 하나는 항상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는 바로 이 다섯 분의 지정석으로, 여기에 누군가 모르고 앉았다가는 그날이 바로 그들의 제사상 받는 날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을 정도였다.
병광 형님은 알고 보면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감성이 풍부하고 그림, 음악, 수예, 공예, 사진, 스키, 산악 등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난 분이다. 그래서 병광 형님의 진면목을 뒤늦게 알아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2008년은 우리 고대산악회가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고대산악 70년사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마침 내가 편찬위원장을 맡아 그 준비로 54학번 다섯 분을 모시고 좌담회를 갖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그래서 속초에 거주하시던 병광 형님을 서울로 오시도록 초청을 하였는데 약속시간보다 먼저 오신 형님과 찻집에서 단둘이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형님이 나를 보고 “야!, 너 지금 몇 살이냐?”하고 물으신다.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내다 보니 항상 어린 시절 모습만 기억하다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내 나이가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형님, 저도 이제 경로우대증을 받을 나이가 되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니 말없이 나를 쳐다보던 형님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내가 당황을 하는데 형님은 목이 멘 목소리로
“상태야, 내가 산에서 너한테 물 떠 오라고 심부름시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너도 어느새 노인네가 되었구나”
형님이 눈물을 흘리는데 후배가 앞에서 멀뚱히 앉아 있으면 불경죄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 두 노인네는 마주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병광형님은 이처럼 감성이 여린 분이다.
병광 형님은 형수님이 수년간 투병을 하는 동안 일체의 외출을 안 하시고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신 정말 지고지순한 열부이셨다. 그런데 끝내 형수님이 돌아가시자 그 상심함은 옆에서 보기가 안타까울 지경인데 몇 년을 방황하던 형님은 형수님과의 추억이 깃든 집이 있는 서울에서 도저히 지내기가 힘들다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과 바다가 있는 한적한 곳, 속초로 낙향을 하셨다.
형님은 속초로 오시면서 3년을 기약하셨다고 한다. 아무래도 3년 이상 더 버티기가 힘들 것 같아 사는 집도 월세로 얻고, 자동차도 소형 중고차로 마련하고, 냉장고와 세탁기, 가재도구들도 당분간 사용할 만한 것들로 장만하였다고 한다.
당시 형님의 작은 아파트는 여러 사람의 화제에 올랐다. 아파트에 들어가면 입구의 작은 방에 텐트가 설치되어 있어 눈길을 끄는데 몇 발자국 더 들어가 펼쳐지는 거실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찬 온갖 소품들, 마치 황학동 고물시장의 물건들을 전부 가져다 놓은 듯한데 가만히 보면 전부 귀한 물건 들이다. 등산 장비, 여러 대의 오래된 카메라들, 그림 그리는 받침대 이젤, 칼, 도끼, 노트북, 컵, 접시 등 헤아릴 수가 없는데 신기한 것은 모든 물건이 무질서 속에 나름대로의 질서를 찾아 놓여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단연 압권인 것은 형님이 벽에다가 직접 그려 놓은 인수봉 암봉의 커다란 연필화의 모습이다.
이런 모든 집안의 모습에서 나는 형님이 아픈 마음을 정리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형님이 3년을 무사히 넘기셔야 하는데…….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경우를 당하게 된다. 그럴 때 그 일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면 점점 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땐 과감하게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기약했던 3년을 넘긴 형님의 경우가 그런가 보다.
지난번 형님이
“3년을 기약하고 속초로 왔는데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
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시는 모습을 보며 형님의 마음이 상당히 편안해지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아름다운 인연의 인도로 가톨릭에 귀의하시니 옆에서 보기에도 안심이 된다.


형님은 겨울철이면 용평 스키장에 방을 하나 마련해 놓고 스키를 타시는데 심심하면 전화를 거신다. 형님은 성격이 단순하시어 상대편의 상황을 별로 생각을 안 하신다.
“상태야 이곳 용평스키장 눈이 끝내준다. 빨리 와라, 뭐? 할 일이 많다고? 네가 할 일이 뭐가 있어, 오기 싫으면 그만두고”
그래서 마음 약한 나는 용평으로, 속초로 갑자기 다녀간 것이 몇몇 번이던가?


그런데 형님이 거처를 속초에서 양양 상왕도리의 공방으로 옮긴 뒤에, 우리의 얘기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 내가 2016년 6월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뒤 집에서 답답해하고 있음을 알아챈 형님의 꼬임에 나는 덜컥 방 하나를 얻어 양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형님의 공방과는 차로 5, 6분 이내의 거리인데 이사를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형님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음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사를 하자마자 형님의 호출이 시작된다.
“ 상태야, 내일 아침 일찍 공방으로 와라, 덥기 전에 빨리 잔디를 깎자”
“ 남 대장, 점심에 속초에 가서 순댓국 먹자, 내가 술 한 잔 하면 네가 운전을 해야 하지 않겠냐?”
처음엔 멋모르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다 보니 나는 마치 5분 대기조 같아서 편안한 개인 시간이 보장이 안 된다. 그래서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막상 전화가 없으면 이 양반 어디 편찮으신가? 하고 궁금해지기도 한다. 참 미워할 수 없는 형님의 행보에 나의 양양 생활은 마음이 바쁘고 하는일 없이 고단하기만 하다.
겨울 철 눈이 많이 온 다음 날 아침 형님의 전화
“남 대장, 어제 눈이 많이 왔네, 해변 경치가 끝내줄 텐데 우리 스키 가지고 사진 찍으러 가자, 빨리 공방으로 와라”
그래서 나는 형님 모시고 스키장 대신에 양양의 파도가 치는 한적한 해변 눈밭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눈 덮인 백사장과 몰려오는 파도가 적당한 조화를 이루어 멋진 경치를 감탄하며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뒤 그냥 갈 수 없다는 형님의 말씀에 근처 식당에 가서 형님은 기분 좋게 소주 한잔하시고 그런 형님의 모습을 보고 나도 덩달아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를 했는데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그림이 아주 그럴듯하다. 나 같으면 눈 덮인 해변은 그냥 지나갈 일인데 형님의 생각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병광 형님의 공방에는 형님이 만들어 걸어 놓은 “MIRACLE"이라는 작은 간판이 있다. 이 공방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인가? 그러고 보니 형님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3년 기약을 하고 오신 것이 10년이 훨씬 지났으니 이런 기적이 어디 있는가?
형님의 연세는 이제 86세 이시다. 우리의 인생은 영원하지가 않다. 문득 어느 시인의 싯귀가 생각이 난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그리고 가지 않으면
歲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한국을 떠나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 생활을 한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지난번 형님과의 통화 중, 지금 앞치마에 수를 놓고 계시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형님의 수 솜씨를 본 지인이 수를 놓은 앞치마 작품들을 가지고 인사동에서 조그만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하여 지금 그 준비 중인데 그때 손님들에게 나누어 드릴 안내 책자에 형님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할머니도 아니고 90이 다 된 할아버지가 앞치마에 수를 놓고 그 작품이 훌륭해서 앞치마 전시회를 하신다고? 기적까지는 아니더라도 형님의 인생 말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마도 양양 공방의 작은 간판 “MIRACLE"의 위력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되는가 보다.
2019년 9월 어느 날,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 병광형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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