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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壬辰倭亂과 己亥半導體亂

by 남상태 2023. 6. 15.

2019.7.19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이 일본의 총칼 앞에 꼼짝 못하고 무릎을 꿇은 뼈아픈 사건이고 2019 己亥年 半導體亂은 일본의 경제 침략에 국가가 초토화 되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이 두 난의 원인은 모두 조선과 한국이 자초한 사건이라 더 어처구니가 없다.

 

국가를 잘 운영하려면 외교에 능해야 한다. 우리가 폭군이라고 알고 있는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의 임금이 된 후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정권이 바뀌는 틈바구니에서 기가막힌 양다리 외교를 펼치면서 어려운 지경의 조선을 지켰다.

 

광해군의 폐위는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데 15년간 재임 중 광해군의 치적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나라 후금()은 빠르게 성장해 점점 영토를 확장해갔다. 그리고 결국 1618년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해 함락한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분으로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요구하는데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원군 파병을 미루다가 1년이 지난 뒤에야 강홍립 장군에게 1만의 병사를 딸려 파병하면서 형세를 보아 적당히 버티다가 명나라의 상황이 안 좋아지면 후금에게 항복하되 조선은 어쩔 수 없이 명나라에 군사를 보냈음을 이해시키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 결과, 명과 후금 두 나라에 불만을 사지 않고 아무런 마찰 없이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니 참으로 적절한 실리 외교라고 하겠다.

 

이런 실리 외교에도 불구하고 한심한 반대파 대신들은 뒤늦은 파병과 또 지원군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에게 성의를 보였다고 하면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맹비난을 한다. 그들은 과연 조선의 신하인지 명나라의 신하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이다.

 

당시 광해군의 양다리 외교는 고도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명나라가 전쟁에서 밀리자 광해군의 지시로 후금에게 의도적으로 항복한 조선군은 7년간 후금에 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동안 볼모로 잡혀있던 조선 군사들은 새로운 강국인 후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때 수집한 정보를 활용하여 광해군은 후에 병사를 훈련시키고 후금의 기마병들에 대항하기 위한 화포와 전차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은 서인들에 의한 반역이 성공을 하면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마는데 당권에 눈이 먼 반대파들은 집권을 하자 첫 번째로 한 일이 광해군의 심복으로 최전방에서 국토방위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을 하던 평안감사와 의주 부윤을 죽이는 일이었다. 당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국방을 무너트린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제주도 강정마을이나 사드배치 반대 등에서도 똑 같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 노선을 폐기하고, 쓰러져 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고집하다가 결국 청(후금)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오랑캐들에게 굴복한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찧어 이마가 피투성이가 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였으며 20만명의 아녀자를 청나라에 납치당하는 치욕을 겪는등 국가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발생 원인과 그 과정, 그리고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광해군이 얼마나 현명한 왕이었고 인조가 얼마나 무능한 임금이었나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가 있다.

 

, 그러면 작금의 상황을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자력으로 해방을 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일본 본토 원자폭탄 투하 덕분에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맞보았다.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절치부심하던 조선인들은 일본이 항복한 후에 일본이라면 이를 갈기 시작한다. 

 

이승만 정부 시절엔 일본과는 아예 왕래를 안 하고 국교를 단절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이 시작되면서 너무 못사는 한국의 경제를 어떻게든지 살리려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온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간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로 인하여 1965 6 22일에 이르러서야한일기본조약이 정식 조인되었고, 그해 12 18일 양국 국회의 비준을 얻음으로써 한일 양국간의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었다.

 

1960년 초는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이다. 그 당시 우리 대학생들은 한일수교를 반대하는 데모를 하느라고 공부하는 날보다 길거리에 나가 데모하는 날이 더 많았고 수시로 휴교령이 내려 학교 문을 닫는 날이 비일비재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왜 반대하고 데모를 그렇게 억척스럽게 했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그저 군중 심리에 휩쓸려 거리로 뛰쳐 나가서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 대고 데모하던 학생이 진압경찰에게 맞아 피라도 흘리는 것을 보면 완전히 광분을 하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는 한일국교 정상화가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손해가 되는 것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군중들의 집단행동이라고 해서 항상 정의가 아니고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60년대 초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1963년 서독에 파견한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나러가는 박정희 대통령은 타고갈 비행기기가 없어 서독 대통령이 보내준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갈 정도였다. 지금 문제인 대통령이 취임 2년사이에 부부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수시로 외국을 방문하는 것을 보면 당시와 지금의 경제적인 차이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한일청구권 협정은 해방 이후 단절된 한국과 일본의 교류를 정상화한 1965년 협정이다. 이 협정은 당시의 우리나라의 경제사정 하에서 경제발전의 교두보를 위한 자금확보의 절박한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이었나?

한일회담 14년은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 할까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상수도 확장(409만 달러).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그런데 문제는 1965년의 한일협정 이후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와서 벌어졌는데 문제인 정권은 당시의 협정을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반대파를 친일파로 몰아 가면서 위안부, 강제징용등 과거사 문제로 일본과 적대관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작년에 한국대법원에서 강제징용배상 판결을 소송자들의 손을 들어 주어 일본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50년전에 양국간이 일괄 타협한 내용을 한국의 법원에서 재판한뒤 다시 뒤집어 버린 다면 상대편은 과연 수긍을 할 것이고 그 재판이 효력이 있는 것인가? 아베 수상은 “1965년에 완전히 끝난 내용을 이제 와서 자기들 끼리 다시 판결을 내린 다는 것은 국제법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얘기를 했다.

만약 반대로 일본이 50년 전에 우리나라와 타협을 해서 결론 내리고 배상까지 끝낸 일을 이제 와서 일본 법원에서 자기들이 판결한 뒤에 다시 배상하라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는 그동안 미국과 일본과 3자 동맹 관계를 맺어 북한의 침공에 맞서 왔는데 이제는 미국 떠나고 일본 떠난 다면 중국과 북한에 의지해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할 입장이 된다.  지금 일본의 반도체 수출 금지로 한국이 발칵 뒤집혔는데도 미국은 모른 척 하고 있다. 그전처럼 사이가 좋았을 때 같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번 일본의 반도체 대란은 일본의 제2의 임진왜란 침공에 비견할 만 일이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때 처럼 준비된 것도 없고 대적할 능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하자는 얘기인가?  우리는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일본 제품 불매운동 어쩌고 하면서 상대편의 심정만 더 거슬리게 하고 있다.

 

그동안 지겹게 물고 늘어지던 위안부, 강제징용등 과거사문제로 일본과 적대관계를 만들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인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당사자는 문제의 심각성도 모른채 먼 산만 바라보고 친일세력 운운하며  반일감정에 선동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