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모르는게 약
남상태
2023. 5. 19. 04:22
길거리 어느 횟집 앞을 지나다가 나는 무심히 횟집 수족관 안에서 활기차게 움직이는 고기들을 보았다. 나는 바다고기들의 이름을 잘 모르지만 아무튼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아래위로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이 제법 생기가 있어 보인다.
그 물고기들을 보다가 나는 문득 이 고기들은 자신들이 잠시 후에 횟감이나 매운탕 감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 비참한 운명에 처해있는 절박한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저 물고기의 처지가 되어 잠시 후에 죽을 운명이라면 나는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생을 생각하며 비참한 심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우리는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을 모르면서 살고 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 백화점이 무너질 것을 안다면 누가 그 백화점을 들어갔겠는가? 그리고 성수대교가 갑자기 내려앉을 것을 알았다면 누가 그 다리를 건너 갔겠는가?
벌써 한참의 세월이 지났다. 1월초 첫째 일요일 나는 OB정기 산행에 참여하여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우리일행은 18명이나 되는 대 부대로 북한산 북쪽 밤골을 산행 깃점으로 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산행 중에 눈이 오니 기분이 업 된다.
“눈이 오려면 펑펑 쏟아지거라”
나의 주문이 효과가 있었는지 눈은 신나게 쏟아진다. 시야를 가리며 쏟아지는 눈은 금새 앞사람의 발자국을 지워버린다.
오래간만에 눈다운 눈을 맞으면서 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가는데 30여분 지나자 선두의 속력이 자꾸만 늦어진다.
“선두 뭐하냐?”
“길이 안보여요”
너무 많이 쏟아지는 눈 때문에 시야가 막히고 계곡길은 쌓이는 눈으로 바위와 개울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평평해지자 선두가 조금 당황을 하는 것 같다.
“야! 눈이 제법 많이 오네!
백운대로 오르는 숨은벽 계곡은 경사가 급하고 길이 험해 일반인들이 잘 안가는 코스인데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은 순식간에 계곡을 덮어버린다. 발목까지 빠지던 눈이 나중에는 무릎까지 빠진다.
날씨마저 엄청 추워져 얇은 장갑으로는 버티기가 힘들어 두꺼운 장갑으로 갈아 끼고 모자도 발라크라바(목출모)로 무장을 하였다.
흥얼거리던 노래 소리는 쑥 들어가고 점점 더 급해지는 경사길과 좌우의 급사면이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샘터에 도착, 평상시 같으면 중식을 할 장소지만 불안한 상황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간식을 먹으며 잠시의 휴식을 취한 후에 출발을 서둘렀다.
앞을 막아선 키 높이의 바위를 힘들게 오르는 앞사람을 받쳐주어 올려 보낸 뒤 나도 올라가려고 발 디딜 곳을 찾고있는데 위에서 이상하게도 눈가루가 스르륵 흘러내린다.
이어서 어디선가 외마디 소리가 나는듯 했는데 순식간에 위에서 쏟아지는 눈 더미를 맞고 나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리고 맹렬한 속도로 밑으로 쓸려 내려가지 시작한다.
나는 순간 직감적으로
“아! 눈사태구나, 아니 이런 곳에서도 눈사태가 난단 말인가?”
“이렇게 거꾸로 내려가다가 바위나 나무에 부딪치면 내 머리는?”
눈사태를 맞아 쓸려 내려갈 때에는 물에서 헤엄치듯 하면서 두팔을 허우적거려야 조금이라도 눈 위로 떠오를 수 있는데 하늘을 향한 채 뒤로 넘어진 나는 속절없이 눈에 묻혀서 휩쓸려 내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아! 나는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흐름이 멈추는가 했더니 이어서 다시 내 몸위로 눈이 덮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사지를 벌린 채 눈 속에 뭍인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는데 주위에서 여러 사람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야 어디?”
“빨리 파라”
“안보여, 뭍인 곳이 어디야?”
모든 소리는 확연히 들리는데 눈에 묻힌 나는 아무 소리를 못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우왕좌왕 하며 이곳저곳 눈을 파느라고 아우성인데 내가 있는 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숨을 못 쉬니 이처럼 답답할 수가 있을까? 점점 숨이 막혀 온다. 질식해 죽는 사람의 괴로움과 두려움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영하 30도가 넘는 동계 에베레스트 캠프2에서 한달을 버티면서도 안 죽고 살아왔는데 북한산에서 눈사태로 죽었다면 참으로 화젯거리가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얼핏 든다.
그렇게 눈속에 묻힌채 숨이 꼴깍 꼴깍 넘어가려는 순간 사지를 활짝 벌린 채 꼼짝 못하던 나는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그나마 움직일수 있는 손가락 끝을 움직여 보았다. 손 끝이 눈 밖으로 나가는 느낌이 온다.
누군가 소리친다.
“여기 누가 있다”
“빨리 파라”
얼굴 쪽을 누군가 맹렬하게 파헤치고 있는데 나는 이제 막 숨을 멈추려하고 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며 내 얼굴은 들어났지만 그 순간 나는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다. 한동안 숨을 안 쉬다보니 숨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나?
상체를 일으키고 살펴보니 나는 30cm정도 밖에 안 묻혔는데 그렇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때 18명의 회원 중 5명이 눈속에 묻혔었는데 만약 4~5명이 갔다가 사고가 났다면 나는 결국 그곳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잠시 후에 눈에 묻혀 죽을 운명인지도 모르고 수족간의 물고기처럼 나는 콧노래 흥얼거리며 눈 오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으
니..........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이 험난한 세상, 오히려 수족관의 물고기들처럼 앞날을 의식 안한 채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고.
“모르는 게 약” 이라는 말은 복잡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한 가지가 아닐런지..........